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자유로부터의 도피

스물여섯 살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自由(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4학년에 복학했을 무렵이었다. 그제야 본의 아니게 머리를 밤송이처럼 깎아야 할 일도, 그 누구로부터 체벌을 당할 일도 없었다.

중고교 시절에는 머리카락 길이가 1~2㎝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길러본 머리도 잠시뿐, 병영훈련을 들어가면서 다시 박박 밀어야 했다. 그 후 경찰의 눈길을 피해가며 당시 유행하던 長髮(장발)의 낭만(?)을 얼마간 구가했으나 그것도 군 입대와 함께 무산되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회초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학창시절에는 선의든 악의든 선생님이나 선배들의 체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군 졸병시절에는 일주일 이상 기합이 없으면 공연히 더 불안했다.

내 몸이 정녕 내 것이었던가? 어쨌든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런 억압 구도와 위해 요소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 나는 진정 自由人(자유인)이었던가.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자유롭게 살았던가.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응답은 솔직히 부정적이다. 누려야 할 자유보다는 그로 인해 걸머져야 할 책임이 늘 앞섰기 때문이다. 막말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표현이 솔직한 심정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유란 누리는 만큼의 책임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유럽에서 나치즘이 창궐하던 1940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명제를 통해 근대인들의 자유에 대한 양면성을 갈파했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 심리를 꼬집은 것이다. 이지적인 독일인들이 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광기에 몰입했는지에 대한 해답도 여기서 찾고 있다. 봉건사회 해체와 함께 사람들은 자연과 종교와 정치와 사회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독과 소외감 속에 살아야 했다.

더러는 책임이 수반되는 자유가 부담스러웠고, 자유와 함께 찾아온 百家爭鳴(백가쟁명)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몰고 왔다. 그래서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권위주의적 질서 속으로 도피해 버렸다는 것이다.

최근 일간신문에 실렸던 두 사진을 떠올려 본다. 하나는 점잖게 시위를 하던 미국 하원의원이 폴리스라인(경찰 통제선)을 넘었다고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어느 노동자 결의대회장의 긴장감 어린 모습이다.

수백 명의 노조원들이 헬멧과 붉은 마스크를 한 채 쇠파이프를 들고 도열해 있는 광경이 사뭇 섬뜩했다.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치려는 것인지…. 이 두 사진이 시사하는 자유의 개념은 어떻게 다를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저마다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지만, 이 혼란한 시국을 두고 정작 "내 탓이오"라는 자성의 목소리는 희미하다.

내 권리를 위한 주장과 절규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당초 고려의 대상도 아닌 듯하다. 법이 보장하는 시위와 집회를 통해 정당한 그 무엇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시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가 혼란스럽다.

공권력이 힘을 잃어 버린 시위 현장은 마치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한다. 최루탄과 백골단의 곤봉이 난무하던 과거 민주화 시위에서 여론은 시위자들의 편이었다. 그런데 죽창과 쇠파이프가 번뜩이는 작금의 시위 현장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그럴까.

작용과 반작용이란 물리학적 개념을 거론할 것도 없이, 萬事(만사) 지나치면 그르치는 법이다. 끝도 없는 갈등과 혼란에 침묵하는 다수의 민심이 피곤해지지 않을지. 차라리 자유로부터 도피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라도 움트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투쟁해서 얻는 것만이 능사일까.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하고 만끽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이제는 모두가 한발 물러서서 보다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조향래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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