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화단의 거장' 정점식 화백 고이 잠드소서…

크로키 200점 완성…계명대 미술대 초석

정점식 계명대 명예교수가 10일 새벽 타계했다. 성주군 대가면이 고향으로 향년 93세.

그는 200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될 만큼 한국 추상회화 계열의 거장이자 대구 추상화의 기반을 닦으신 분이었다. 그런 높은 경륜으로 올해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한국 추상회화 운동을 일으키고 지속시킨 중추에 선 존재였다.

대구 추상회화 계열의 본산인 '신조회'(新潮會) 결성에 1972년부터 적극 참가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가 기아에 허덕이던 1960년대 초반, 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아직 요원했던 척박한 풍토에서 그는 미술이 미래의 길이라고 자부하며 계명대에 미술학과를 신설, 1964년부터 초대 학부장과 초대 예술대학장 등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계명대 미술대학이 존재토록 한 초석을 닦으신 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삶과 예술 세계에 대해 아직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놀랄 만한 점들이 있다. 우선 삶에서 보면 그는 예술가로서도 교육자로서도 한마디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곧 예술로써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일제 암흑기에 젊음을 보내면서 대학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무학(無學)의 상태에서, 그 당시 일본을 통해 새롭게 유입된 서양 미술이라는 분야를, 그것도 아무나 섭렵하기 어려운 추상회화의 세계에 빠져 그것을 자기 독자화(獨自化)로 정립하여 대성시킨 야심 찬 집요함을 보인다. 서양 미술에 관한 이론 서적을 닥치는 대로 독파하여 화가이지만 누구보다도 서양 미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술 이론가로서도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다.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저술(著述)도 적지 않다. 작품이나 이론의 내용에 설득력이 있어서 알맹이를 가진 만만찮은 예술가로서 자리 잡았다.

작품 세계에서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1950, 60년대는 서구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미술사조인 추상화, 입체파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거치면서 계산되고 정선된 화면 구성으로 이지적인 작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만년에 이르러서는 감성적인 느낌으로 가득 찬 화풍(畵風)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작품의 양과 질 모두에서 그의 예술의 절정기가 되는 1980년대에는 마치 서예 같은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선묘로 일관하여 시각적으로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화면을 보인다. 예술이라는 세계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찾은 것.

그는 남다르게 200여점에 이르는 크로키(croquis)를 남기고 있다. 미술에서 크로키라고 하면 속사(速寫)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습작용으로 그리지만, 정점식의 그것은 하나의 완성작이 대부분이다. 주로 여체(女體)를 단순 선묘의 맛을 중시하여 흐르는 선묘의 맛 그 자체를 목표로 한 것으로서, 크로키도 그의 생체 리듬감 자체를 예술화한 특성에서 얻어진 소산이라 할 것이다.

교육자로서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경륜을 쌓은 인물이다. 특히 후진들에게도 귀감이 될 좋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1975년부터 계명대 미술대학에 장학금을 마련, 지금까지 '극재미술장학금' 제도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간 많은 작품을 기증해 계명대 극재미술관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다.

대구와 한국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가신 정점식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이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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