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황병수의 쿠바 여행](상)쿠바는 살아있는 화석, 골동품 전시장

저가항공이라 서비스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저가항공인 '에어 아시아'보다는 훨씬 친절하고 기내식도 먹을 만했다. 물과 음료도 공짜다. 단지 맥주는 비싼 레스토랑에서 마시는 가격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1박하고 다음날 아침 하바나발 콘돌항공에 올랐다. 장시간 비행에서 오는 이코노미석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벌크석이나 비상구 또는 비즈니스석 바로 뒤 통로석을 얻는 데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있다.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좌석에서 오는 불편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멸치 통조림이 유통기한을 하루 앞두고 막 퍼질 시간이 되었을 즈음, 육중한 몸매지만 날렵함을 자랑하듯 사내가 들어왔다. 제법 운전을 할 줄 아는 조종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사이에 하바나 호세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시골동네처럼 정겹고 아담했다. 입국 절차를 위해 대기 중인 200명 남짓 되는 여행객들 중에 노란색은 나 하나밖에 없다.

작년 초, 에스토니아에서의 여행처럼 마치 노란 종족은 책에서만 보아온 사람들처럼 오히려 내가 원숭이가 되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입국 절차를 밟기 위해 늘어선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0여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분통 터지는 출입국 절차의 악몽이 스치지만, 지루한 입국 절차를 차라리 즐기기로 했다. 거의 한 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심사대에 섰다. 30대 중반은 족히 돼 보이는 경찰 같은 계급장에 유니폼 차림의 직원은 전형적인 뮬라토족 여성으로 아침 출근 전에 남편과 한바탕 한 듯한 싸늘한 얼굴로 내 여권과 비자를 뒤적이며, 깨지는 듯한 세련 안 된 포르투갈식 영어 발음으로 마구 질문을 던진다.

"뭐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비즈니스"라고 말해 버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무슨 사업?" 하고 묻는다. 순간 당황했지만, 능청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미안, 실수다. 사실은 관광이다." 음산한 미소를 슬쩍 보이면서 또 묻는다. "숙소는?" 나가서 까사 빠르띠꿀라(민박)를 구할 예정이다. 그래서 아직 모른다. 난감해 하는 표정을 보니 숙소를 꼭 적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하바나이니까 '하바나' 이름의 호텔이 있겠지 싶어 "하바나 호텔"이라고 급하게 뱉어내니 그대로 적는다. 이 밖에도 입국 수속과는 무관한 질문을 몇 차례 더 받은 후에야 겨우 풀려 날 수 있었다.

미리 정보를 알고 왔지만 쿠바는 특이하게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는다. 쿠바 방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인이 정부 허가 없이 쿠바를 방문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 미 정부의 조사를 받아야 하며,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한다.

세계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입김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쿠바 정부는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편법을 통해서 여행객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고 한다.

공항 환전소에서 외국인 전용 화폐로 교환 후 택시를 타고 올드 아바나로 향했다. 쿠바는 내국인이 사용하는 돈과 외국인이 사용하는 돈이 다르며, 외국인은 반드시 전용 돈을 교환해 지정된 장소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어디에 가더라도 빈틈은 있는 법이니까.

나도 나중에는 내국인 돈으로 일부 교환, 좀 더 경제적으로 여행하면서 절약할 수가 있었다. 내국인과 외국인의 물가 차이는 최소 5~10배쯤 되는 것 같았다.

쿠바는 살아있는 화석이며, 골동품 전시장이다. 시내 곳곳의 건물들은 앙코르 와트의 바이욘 사원보다 더 낡아 보였고, 최소한의 부속품만으로 움직이는 자동차의 나이는 환갑을 넘나드는 듯하다.

시내 곳곳은 체의 사진과 구호들로 광고판을 대신하고 있으며,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보면서 이곳이 지구상 마지막 남은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피델이 죽고 나면 맥도날드'코카콜라 등 쓰레기 같은 간판들이 쿠바를 뒤덮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듯 했다.

쿠바는 남미에서 가장 잘 돼 있는 교육제도, 미국 영유아 사망률보다 더 낮은 의료시스템을 갖춘 나라다. 교육과 의료가 모두 무상이며 저렴한 각종 생활요금, 세계적인 유기농법을 통해 생산된 오염 안 된 각종 신선식품들…. 그러나 이 중 화폐 체계가 무색하리 만큼 외국인 전용 화폐를 요구하는 대부분의 상점과 사람들. 배급과 또 다른 목적의 길게 늘어선 줄들. 슈퍼마켓이나 재래시장에서의 다양하지 않은 각종 품목들. 일거리가 없어 골목골목마다 삼삼오오 담배 연기 날리면서 그저 시간만 죽이는 한결같은 재미없는 표정들.

그런 길을 지나가면 대부분 '치노'(중국인)하고 부르면서 '시가'(쿠바 담배)나 '치카'(섹스)라고 외쳐댄다.

이곳의 통신요금은 비싸기 그지없다. 30분에 5달러씩이나 하는 인터넷은 창이 한번 바뀌는 데 길게는 3분 이상 걸린다. 전화 사정은 좋은 편이나 한 번 통화하는 데 길지 않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12달러 이상을 내야만 했다. 그래서 인터넷은 아예 포기하고, 이틀에 한 번씩 집으로 전화를 해 안부만 확인했다. 이렇듯 뚜렷한 양면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내가 여행해본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커다란 힘이 느껴진다.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다른나라처럼 비참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거지는 보이지 않았고, 대화 중에 간간이 느낄 수 있는 자존심은 상당했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나라지만 인종 차별은 전혀 느끼지 못했고,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도덕적 기준을 유지해오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hbs498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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