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는 시원한 베트남 스타일 냉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베트남 커피의 맛은 바로 양철로 만든 커피 드립퍼에 있다. 바늘 구멍 정도의 구멍들이 불규칙하게 뽕뽕 뚫려있는 쟁반 위에 역시 바닥에 불규칙한 구멍을 뽕뽕 뚫어놓은 찻잔을 하나 올리고 앙증맞은 뚜껑을 닫아놓은 게 양철 드립퍼의 모양새다. 커피잔 위에 이 양철 드립퍼를 올리고 진한 베트남 커피가루를 담아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베트남 스타일의 커피가 완성된다. 거기에 얼음을 넣으면 시원하고 구수한 냉커피가 된다.
베트남 커피는 거름종이 없이 드립퍼에 얼기설기 제 맘대로 뚫려있는 구멍으로 커피를 내리기 때문에 시커먼 커피가루가 커피잔 바닥에 깔린다. 커피가루를 씹지 않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선 가루가 가라앉도록 몇 분쯤 기다렸다가 마셔야 한다. 하지만 냉커피에는 얼음에 커피가루가 엉겨 붙어서 가루를 피해 마시기가 쉽지 않다. 환경호르몬 따위를 걱정하는 우리로서는 양철 드립퍼에 커피를 내린다는 것도 영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인지 베트남커피 특유의 진한 커피냄새 속엔 은근히 양철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게 또한 베트남 커피의 맛이다. 이상하게 구수하다.
호찌민에서 나짱(베트남의 해변 휴양도시)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 같다. 베트남 여행자들은 대부분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오픈투어버스'라는 걸 타고 여행을 한다. 이 버스는 예를 들어 남쪽의 호찌민에서 북쪽의 하노이까지 오픈티켓이란 걸 끊으면 중간에 정차하는 도시마다 마음대로 내리고 탈 수 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깨끗한 좌석이 구비되어 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며 일반 버스회사에서 운행하는 시외버스보다 빠르고 편리하다. 그래서 외국인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탄다. 점심시간이 되면 오픈투어버스는 여행사와 연계된 식당에 내려준다. 그때 우리는 그런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원한 냉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안녕하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치며 누군가 다가왔다. 베트남 현지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한국인 아저씨였다.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두꺼운 고동색 양복을 입고 007가방 같은 걸 들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인가 싶었는데 아저씨는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의자를 당겨 털썩 앉더니 "여행 중이세요? 저도 여행 중입니다!"라고 유쾌하게 외쳤다. "서류가방 하나 들고 여행 다니세요?"라고 물었더니 식당 문 앞에 쌓아둔 라면박스 두 개를 가리킨다. 설마, 저 라면박스에 짐을 싸서 다닌다고? "도둑놈들이 절대 안 건드려요. 잃어버릴 걱정 없이 아무데나 부려놓고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라며 아저씨는 껄껄 웃는다.
양복을 입고 라면박스에 짐을 싸서 다니는 한국인 아저씨 여행자라니! 이분이야말로 TV프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만하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 아닌가. 아저씨는 혼자 다녔더니 너무 심심했다며 같이 앉아 밥 좀 먹겠다고 한다. 우리는 아저씨의 넉살에 붙잡혀 꼼짝없이 그러시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아저씨의 더 놀라운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이! 여기!" 아저씨는 손을 번쩍 들더니 한국에서 아저씨들이 식당 종업원을 부르는 말투 그대로 베트남 식당의 종업원을 부른다. 종업원은 냉큼 달려왔다. "새우볶음밥 하나 줘!" 당연히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업원은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벅거린다. 아저씨는 손으로 새우모양을 그리며 "새우! 새우! 새우랑 밥이랑 볶은 거!"라고 외치더니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머리에 세워 새우수염을 만들고 엉덩이를 삐죽 내밀어 새우꼬리처럼 흔들어댄다. "새우! 새우!"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더니 몇 분 후에 정말로 새우볶음밥을 가지고 왔다. 우리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대단하세요!"
혼자 여행 한 번 해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다고, 그래서 가족들 떼어놓고 무작정 베트남으로 왔는데 처음엔 영어도 모르고 베트남어도 몰라서 고생 많이 했는데 한국어로 얘기해도 다 알아듣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이렇게 한국어도 세계적으로 알리고, 이게 바로 애국이죠"라고 말하며 껄껄 웃는다.
나 역시 나름대로 여행에는 베테랑이라고 자부해왔는데 이 아저씨에게는 졌다 싶었다. 저 정도 배짱이면 밀림이든 사막이든 혼자 못 갈까. 식사를 마친 후에 아저씨도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 때였다. "빵빵-." 버스가 출발신호를 울렸다. 아저씨는 냉큼 버스기사에게 달려가서 한국어로 한참을 설명한다. 커피를 주문했으니 좀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으리라. 그리고 식당 주방으로 달려가서 커피를 받아 버스로 다시 뛰어갔다. "여행 잘 해요!!" 아무도 모르는 이국만리에서 혈혈단신으로 여행하면서 영어문장 한 줄 말하지 못해도 커피 한 잔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챙겨 버스에 오르는 아저씨, 당신을 진정 여행의 달인으로 임명합니다.
지금 여행을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든 아빠들, 뭘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여행해야 하나 두려워하지 말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가기를. 오늘 저녁 양복 입고 서류가방 들고 퇴근한 모습 그대로 그냥 비행기를 타시면 됩니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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