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장뇌삼이 전해준 우정

봄이 돼지 꼬리만큼이나 짧은 대구에서는 여름을 예고하듯 벌써 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나 아른거린다. 여름 같은 봄날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그 어느 날 오후, 전화선 너머로 친구 같은 선배 한분의 괄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늘 진료하세요?" 환자 부탁하는 업무상 전화이겠거니 생각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예" 했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란다. 10분 내에 달려온다고 한다. 병원 근처라 가능한 일이지만 급하게 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잠시 후 헐레벌떡 진료실로 뛰어 들어오는데 그분의 손에는 신문지로 둘둘 말린 투박한 상자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항암 효과는 장뇌삼이 최고야! 홍삼도, 인삼도, 어떤 생약도 못 따라가!"라면서 신문지를 펴는데 장뇌삼이 이끼를 이부자리삼아 마치 혼기를 기다리는 색시처럼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그리곤 생수로 흙을 대강 흘려보낸 후 내게 건네면서 "한입에 씹어 삼키라"고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그 큰 눈을 부라리고 앞에 섰다. 입 속에 씹히는 장뇌삼 사이로 양념처럼 서걱대는 흙 알갱이도 느껴졌다. "흙이 덜 씻겼다"고 항변할 시간도 용기도 없었다. 분위기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눌려 독약을 들이밀어도 먹을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전광석화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얼마 전 갑상선에 조그만 혹이 생겨 악성이라고 화들짝 놀란 뒤 바로 수술하고,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아픔은 내게 축복으로 인생의 안단테리듬을 선사하였다. 이 축복암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의 구분 없이 다람쥐 챗바퀴 돌듯 단조롭고 바쁘게 살아가는 내게 가던 길 멈춰 서서 눈부신 햇살 아래 반짝이는 오월의 새싹을 보게 하시고, 거리에 지나가는 유모차 속 귀여운 아기의 웃음을 만나게 하셨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잠시 주위를 돌아보게 하여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라고 말로, 행동으로 부르짖는 많은 진정한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다. 원래부터 있어온 사람들이지만 내가 둔감해 지나쳐 버렸는데 아둔한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지혜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진정한 친구를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친구란 만 리길 나설 때 처자를 맡기고 갈 사람,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 저 맘이야 믿어지는 사람,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할 사람,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떠날 때 빙긋이 웃고 눈 감을 그 사람,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할 사람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진정한 친구를 가졌는지 꼽아보니 열 손가락이 넘는다. 나는 감사하게도 너무 많이 받고만 살았다. 삶의 중턱을 훌쩍 넘겨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나이가 되어서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몇 사람에게 진정한 친구가 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일이다. 내가 맘 맡길 사람도 소중하지만 내게 맘 맡기고 위로받을 사람, 내게 처자 맡기고, 내 구명보트를 양보받을 사람, 나의 "아니"라는 한마디에 자신의 철학을 바꿀 사람, 내가 장뇌삼을 흙범벅하여 먹일 사람을 가지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자책이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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