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은 청각에로만 쏠린다.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다. 감촉은 더더욱 없다. 온 신경이 귀로 몰려든 느낌. 총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용수철처럼 저절로 튀어 오른다. 땅은 호흡보다 빨리 지나간다. 세상은 고요하다. 아니,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시선은 바닥이다. 트랙 바닥이 빠르게 밀려난다. 머리에 바람이 부닥친다. 그렇게 바닥은 계속 뒤로 밀려난다. 이제 고개를 들어야 할 시점. 바람은 다시 얼굴과 가슴에 부닥친다. 호흡은 점점 빨라진다. 숨소리도 거칠어간다. 생각은 없다. 달린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저 달릴 뿐이다. 아픔이다. 아픔의 마지막 순간 비로소 하늘을 본다. 그 아픔은 '해냈다'는 성취감과 희열로 바뀐다.
단거리 육상. 짧게는 10여초, 길게는 40여초를 위해 매일 수 시간을 달린다. 외롭고 힘든 싸움이다. 기록과의 싸움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고통과 희열은 비례한다. 그 고통과 희열의 깊이는 기록이 말해준다. 단거리 육상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종목이기도 하다. 신체적 특성상 세계 기록에 크게 못 미치는 종목이란 점도 국민적 관심도가 낮은 이유의 하나다. 육상 지도자들은 ▷기록을 내는 선수들에 대한 인센티브 ▷시설 못지않은 인적 투자 ▷은퇴 선수들의 지도자 진입 폭 확대 등이 한국 육상의 저변확대와 기록향상의 필수요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2011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지역에서 가능성을 엿보이는 선수들이 있어 눈길을 모은다. 여자 100m, 200m의 이선애(15·대구 서남중 3년), 남자 200m, 400m의 박봉고(18·경북체고 3년), 남자 110m 허들의 김병준(18·대구체고 3년). 모두 한국 육상의 꿈나무이자, 유망주다. 이들의 땀과 거친 숨소리는 2011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성공을 예고하는 듯하다. 세계적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고, 자신감도 차있다. 엄청난 훈련만큼 기록 경신의 속도도 빠르다. 이들을 만나 한국 육상의 가능성과 희망을 점쳐봤다.
◆괴물, 이선애
이선애는 달릴 때만큼은 '괴물'이다. 육상선수로는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서 폭발적인 스피드가 나오기 때문이다. 릴레이에서 다른 선수들을 추월하는 모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최근 전국소년체전에서 이선애의 역주를 본 장내 아나운서도 '괴물 이선애'라고 했다. 이선애는 육상선수로는 다소 작은 체구(162㎝, 50㎏)란 점을 제외하고는 대성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는 평이다. 기본기, 기초체력, 주법, 집중력과 승부근승, 순발력 등이 모두 뛰어난 것.
전재봉 서남중 육상부 감독교사는 "전국 어떤 선수보다 주법이 훌륭하고, 자세도 '교과서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이선애는 중학교 때까지 달리기 선수를 했던 어머니의 운동기질을 물려받은 듯하다. 대천초교(대구시 북구 읍내동) 3년 때부터 육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교사들의 권유로 서부교육청장배 육상경기대회(소년체전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1등을 한 뒤 학교에 육상부가 생겼다. 육상부 선수로는 이선애가 유일했다. 그는 이후 놀라운 기록행진을 벌이고 있다. 지난 4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여자 100m 결승에서 11초 88에 골인, 여자 중학부 기록을 23년 만에 깼다. 지난 5월 30일부터 나흘간 전남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3관왕(100m, 200m, 400m릴레이)에 오른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이선애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하루 3시간씩 훈련을 한다.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주로 200m 연습을 한다. 200m를 훈련하다 보면 자연히 100m 기록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훈련하는 게 가장 힘들다"며 "육상부 친구들 외에 가까이 있는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라고 말했다. 또 "운동선수라고 특별히 뒷바라지하시느라 힘들 텐데 말없이 믿고 챙겨주시는 부모님에게 늘 감사하다"고 어른스러움도 나타냈다.
양념불고기를 가장 좋아하는 이선애는 존경하는 육상선수로 미국의 흑인 여자선수인 로린 윌리엄스를 꼽았다. "나처럼 키가 큰 편이 아닌데도 이를 극복하고 좋은 실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선애는 여자 100m 한국기록인 11초 49를 깨고 2011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1차 목표다. 그는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 꼭 출전해 좋은 기록을 내고, 나중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앳된 얼굴과 왜소한 체구였지만, 목소리엔 당찬 기운이 있었다.
◆강한 승부근성, 박봉고
박봉고는 강한 승부근성과 성실함이 돋보인다. 이상국 경북체고 육상코치는 "항상 성실하고 열심히 훈련하며, 승부근성이 강한 것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 농구와 축구로 다져져 몸이 유연하고 부드럽다. 감독과 코치는 '달릴 때 어깨에 힘만 조금 빼면 더할 나위 없다. 더 나은 기록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성실함, 유연성, 자신감, 주법, 승부근성 등 육상선수로서의 요건을 잘 갖춘 셈이다.
조용한 성격과 달리 자신감은 꽉 차 있었다. 그는 200m 21초 14, 400m 46초 5로 모두 1초 이상 기록을 당겨야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그는 "기록단축 속도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난해부터 400m를 주 종목으로 훈련하고 있는데, 4일 대구에서 열린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46초 57로 대학부와 일반부 선배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육상선수로 이끈 김도현(봉화 상운중) 교사가 큰 힘이 되고 있다. 김 교사는 6년 동안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요즘도 종종 전화를 걸어 "몸관리를 잘해라. 네 몸이 금이고, 다이아몬드다. 초심을 잃지 마라"고 조언과 격려를 한다. 박봉고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했다.
봉화 석포중 1학년 때 김 교사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해 상운중, 경북체중을 거쳐 경북체고로 왔다. 그는 하루 평균 4시간의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한다. 국가대표이지만 이종우 경북체고 육상부 단거리 감독교사의 요청으로 경북체고에서 훈련하고 있다. 태릉선수촌에는 400m를 전담할 코치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체력 관리와 관련, 그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보약과 소고기를 자주 먹는다"며 "고기, 특히 안창살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400m가 주종목인 미국인 백인선수 제레미 워리너를 가장 좋아한다. 그의 꿈도 역시 육상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육상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고, 은퇴한 뒤에는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자이언트, 김병준
김병준은 육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3년째다. 하지만 그의 자질과 잠재적 가능성 때문에 지난해 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조영호 대구육상연맹 전무가 그의 신체적 조건과 가능성을 보고 대중금속고(대구 달성군)에 다니던 그를 추천, 고교 1학년 4월에 대구체고로 전학했다.
오성관 대구체고 단거리육상 감독교사는 "큰 키와 신체조건이 아주 좋지만, 기초체력, 기본기, 출발능력 등이 부족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그는 키 190㎝, 몸무게 78㎏으로 110m 허들을 위한 신체조건으로는 제격이다.
현재 태릉선수촌에 있는 그는 하루 6시간 이상의 혹독한 훈련을 잘 견뎌내고 있다. 새벽, 오전, 오후 훈련 등 하루 생활의 대부분이 훈련일정으로 짜여 있다.
김병준은 "훈련이 쉽지만은 않지만, 기록단축과 장래를 위해 잘 소화할 수 있다"며 "체격조건과 구간 간격이 좋다고 하지만, 부족한 근력과 파워 등 체력과 스피드 보완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서 남자 단거리선수 중 고3년생은 김병준이 유일하다. 막내인 셈이다. 태릉선수촌 육상선수들은 그에게 키가 크다고 '자이언트'란 별명을 붙여줬다. 그는 "모두 형이고 삼촌 같다"며 좋아하는 선수도 룸메이트인 박태경(29), 이정준(25) 선수라고 했다. 외국선수로는 중국 류시앙, 미국 흑인 육상선수 알렌 존스 등을 꼽았다.
김병준의 110m 허들 공식 최고기록은 14초 69. 한국기록 13초 53에는 1초 이상 뒤진다. 하지만, 자신감은 충만하다. 그는 "2011년 육상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서는 1초 이상 기록을 앞당겨야 하는데,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또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이달 말에는 외국 전지훈련도 나갈 예정이다. 전지훈련은 국제경기의 간접경험을 쌓고, 외국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알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또 은퇴 후 지도자 생활과 관련해 "선수입장을 잘 이해하고, 의견을 잘 반영하는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병구기자 mincho@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