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상반기를 멋지게 장식할 영화가 나왔다. 앞서 박찬욱의 '박쥐', 봉준호의 '마더'는 역작이기는 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한국 관객은 장르, 소재, 주제를 불문하고 코믹 영화를 좋아한다. 가뜩이나 힘든 시절임을 감안하면 더욱 당연한 일이다. '7급 공무원'은 가볍고, '김씨표류기'는 갑갑했다. 관객 반응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2% 부족한 감이 있었다. '거북이 달린다'는 고루 갖췄다. 시작부터 끝까지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지만 영화는 시종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고, 적절한 반전을 통해 관객의 뒷통수도 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 주연과 조연급 배우들의 연기력이 탄탄했다.
◆거북이는 도대체 왜 달렸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거북이 달린다'는 바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 상황은 이렇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니는 두 딸을 둔 아빠이자 5살 연상인 아내의 남편. 명색이 형사지만 하는 일이라곤 지역 발전을 위한 소싸움 대회 준비가 고작인 그저그런 경찰관. 만화방을 하는 아내는 집에서 눈만 뜨면 부업까지 해가며 돈 벌려고 악착스럽게 굴지만 세상의 돈은 다 종적을 감춘 것만 같다. 어느 밤 돌아누운 아내와 운우지정을 나누고자 엉덩이를 더듬는데 손에 잡히는 것은 아내의 구멍난 팬티. 착잡한 마음에 애꿎은 담배만 피워댄다. 그런 와중에 친구와 짜고 성매매를 알선한 포주를 잡아들였건만 갑자기 취조 도중 포주가 심장 발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칭찬은커녕 정직 3개월 처분까지 받는다. 지지리도 재수가 없다보니 뒤로 자빠져서 코가 깨진 형국이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소싸움 대회에서 우연찮게 우승 후보 소가 감기 몸살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아내가 몰래 모아온 돈 300만원을 결승전에 올라온 다른 소에게 건다. 무려 6배의 횡재.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주인공은 뒤로 자빠져도 코를 깰 수 있는 엄청난 불운을 안고 사는 남자다. 1천800만원의 돈이 눈 앞에서 사라진다. 바로 이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 때문이다. 수사 전담팀까지 만들어서 몇 년째 쫓고 있지만 종적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인물. 게다가 무술경관 예닐곱명을 한 번에 때려눕힐 정도의 무술 고수다. 주인공도 멋 모르고 덤벼들어서 흠씬 두들겨맞고 기절했다가 이튿날 동네 개가 와서 얼굴을 핥는 바람에 겨우 깨어날 정도였다. 동네 신문에는 '출세에 눈이 먼 시골 형사가 다 잡은 탈주범을 놓쳤다'고 대서 특필되고, 결국 경찰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다시 묻자. 당신이라면 어쩌겠는가?
◆자존심을 향해 달리는 거북이
사실 답은 뻔하다. 주인공 조필성(김윤석)은 당연히 탈주범을 쫓는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제 아무리 뛰고 날아봐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주인공은 왜 그랬을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밖에서는 제법 큰 소리를 치고 다니지만 아내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꼴이다. 동네 유지에게서 받은 촌지로 딸에게 인심 한 번 쓰려고 했다가 아내에게 죄다 뺏겨도 말 한 마디 못한다. 초등학생 딸 옥순이는 어떤가? 비록 아빠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엄마가 고이 모아온 300만원을 홀랑 날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빠 도대체 왜 그래?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알아?"라며 면박을 준다. 동료들은 사고뭉치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탈주범은 "당신 진짜 형사 맞아?"라며 코웃음을 칠 정도다. 아무리 용을 써봐야 '거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죽을 각오를 하고 달린다. 바로 자존심 때문이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대한민국 형사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 찾고, 폼 나게 개선하고픈 마음이다.
배우 김윤석은 팬들의 기대에 120% 부응했다. 동네 양아치 비슷하게 거리를 쏘다니며 이죽거리는 모습, 아내에게 등짝을 후려맞으면서 팬티 바람으로 쫓겨나는 모습, 새끼 손가락이 잘린 가운데도 탈주범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까지 그는 철저하게 형사 조필성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7년생인 배우 김윤석이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작품은 영화 '타짜'(2006년)에서 아귀역을 맡았을 때부터였다. 마치 피가 뚝뚝 흐르는 선지 덩어리를 질겅질겅 씹어대듯 내뱉는 그의 대사와 교활하고 음흉한 표정 연기는 압권이었다. '추격자'(2008년)에서 전직 형사 엄중호역을 맡아 제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 주연상을 받기도 했던 김윤석은 선 굵은 연기파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사실 그의 출연작이 나이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지만 팬들이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있다. '즐거운 인생'(2007년), '천하장사 마돈나'(2006년·주인공 동구 아버지역), '파랑주의보'(2005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 등이 있다.
◆빛나는 조연들과 탄탄한 스토리
형사의 아내 역을 맡은 견미리의 연기력이 돋보였다. 남편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아내의 악다구니 속에도 가장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담아냈다. 그저 악만 쓰는 게 아니다. 세상 다 산 것마냥 체념하듯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300만원을 날리고 돌아온 남편의 등짝을 내려치며 팬티 바람으로 내쫓다가 계단에 주저앉아 짓는 그 허망한 표정이라니.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시티홀'에서 시장 신미래(김선아)에게 늘 딴지를 거는 재수없는 기획예산국장 역을 맡은 배우를 기억하는가. 바로 신정근이다. 영화에서는 형사 조필성의 친구이자 딱히 내로라할 직업도 없는 건달로 나온다. 조필성과 함께 탈주범을 쫓으며 온갖 말썽을 일으키는 장본인. 괜스레 소 싸움장에서 탈주범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그 날 밤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다. 탈주범 송기태 역을 맡은 정경호. 날렵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싸움의 달인.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범죄 현장으로 되돌아온다. 비록 김윤석의 연기력에 다소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상처입고 쫓기는 야수와 같은 눈빛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태봉이의 아내 역을 맡았던 선우선은 탈주범을 사랑하는 다방 아가씨 경주 역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탈주범 기태를 위해 거리에 나붙은 현상수배 전단을 떼어버리고, 조촐한 생일 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사랑과 정에 굶주린 여인. 김윤석을 '원톱'으로 내세운 영화지만 수많은 조연들의 빛나는 연기 덕분에 영화는 시종일관 탄탄한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끝맺음을 시도한 것이 다소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저 한바탕 웃고 넘기기에 충분할 정도의 선을 지켜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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