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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제일 客舍 '상산관'…외국 사신·시인 묵객 머물던 곳

상주 임란북천전적지에 자리한 상산관은 영남의 제 1객사로, 수많은 사신이 왕래하고, 전령의 임시 쉼터였다. 상산관은 때론 시인묵객들이 찾아 시와 노래를 즐긴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했다.
상주 임란북천전적지에 자리한 상산관은 영남의 제 1객사로, 수많은 사신이 왕래하고, 전령의 임시 쉼터였다. 상산관은 때론 시인묵객들이 찾아 시와 노래를 즐긴 시문학의 보고이기도 했다.

상주 시내에서 속리산 가는 길목에 고풍스러우면서도 제법 규모가 큰 옛 건물이 턱 하니 서 있다.

바로 상주가 자랑하는 영남 제 1의 객사(客舍)인 상산관이다. 객사는 옛날 외국 사신이나 전령들의 숙소였고, 때론 선비들의 연회나 시회(詩會)의 공간이었다. 마침 일행이 찾은 상산관의 드넓은 마루에는 젊은이 3명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옛날로 치면 외국의 사신이었고, 나라에서 내린 전령이었을 게다. 한편으론 시와 노래를 즐기는 선비였지 않았을까.

상산은 상주의 별호다. 990년인 고려 성종 때 상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를 보면 상산이라는 이름도 천년을 넘게 이어왔다. 그래서 상산관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객사는 조선시대에는 전패를 안치해 초하루와 보름에 지역의 고을 책임자(지금으로 치면 시장과 군수)가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는 신성한 곳이기도 했다. 상산관의 객사 안에는 옛날 향망궐배(向望闕拜)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상산관은 왜 영남 제 1의 객사일까? 고려시대 상주목의 객사는 상산관이었다. 상주목은 바로 고려 8목(조선으로 치면 팔도 수준의 행정 단위)중 한 곳이다. 상주는 사벌국 이래로 영남의 으뜸 고을이었다. 그 으뜸 고을의 객사가 바로 상산관이니 영남 제 1의 객사로 통하는 것이다.

상산관은 본관과 좌우에 익실(翼室·동익헌과 서익현)을 뒀다. 동익헌은 전면이 7칸이나 된다. 남부지방의 객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규모면에서도 상산관은 영남 고을의 으뜸이었다.

상산관은 시인묵객이 솜씨를 뽐내던 곳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가사체문학의 효시인 서하 임춘이 고려 명종 때(1175년 전후) 상산관에서 관리들과 시를 주고 받았고,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이자 당대 문장가인 백운 이규보도 상산관을 찾았다. 안축, 김종직, 신잠, 황준량 등 당대의 문장가들도 상산관에서 시문을 남겼으니 어찌보면 상주 시문학의 수준이 당대 전국 최고였지 않았을까.

그 옛날 객사는 '숙소'라는 기능을 넘어 시와 노래가 있었고, 성스러운 곳이었다. 상산관을 주마간산으로 보아선 안될 것 같다. 이제 시와 음악, 신성함을 가슴에 담고 상산관을 새롭게 방문해야 하지 않을까.

이종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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