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사임당 신씨

말도 많았던 5만원권 지폐가 6월 23일부터 나온다고 한다. 이 5만원권에 사임당 신씨의 초상화가 들어간다. 여기에는 여성 단체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초상화가 이미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지자 사임당 신씨의 초상화가 오죽헌 몽룡실에 있는 표준 영정이 아니라고 신씨 가문의 반대도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커져 1만원권 지폐가 필요했다. 1만원권 지폐에 석굴암 본존불 사진을 넣으려 하자 종교계의 반대가 심하여 이를 포기하고 5천원권 지폐를 발행하기로 했다. 여기에 사임당 신씨의 아드님인 율곡 이이 선생 초상화를 넣었다. 당시 영국에서 돈을 찍었는데, 영국에서 디자인한 율곡 선생의 모습이 꼭 서양 사람 같아 한동안 논란이 많았다. 그래서 다시 디자인해서 만든 것이 현재 쓰고 있는 5천원권이다.

1970년 당시 1만원권을 포기하고 5천원권을 먼저 발행한 것, 현재 10만원권 발행에 대한 논란이 많아 먼저 5만원권을 발행한 것도 비슷한 상황이다. 또 1972년 당시 최고액권인 5천원권, 현재의 최고액권인 5만원권에 아드님과 어머니의 초상화가 올려지게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초상화를 그린 이종상화백은 37년 거리를 두고 당대 최고액권에 올릴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사임당 신씨(1504~1551)는 아버지 신명화, 어머니 이씨 사이에 딸만 다섯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봉건사회 여성답지 않게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따님인 사임당에게도 좋은 교육을 시켰다. 신씨는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열심히 읽어 뛰어난 학식과 교양을 쌓았다. 신씨의 호(號) '사임(師任)'의 '사'는 '본받는다', '임'은 주(周)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한다.

덕수 이씨 이원수와 결혼한 후에는 강릉에 혼자 계시는 친정 어머니와, 서울 시부모를 정성껏 섬겼다. 남편은 벼슬도 변변치 못했고, 집안도 가난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4남 3녀를 낳아 잘 길렀다. 3남 율곡을 비롯해, 맏딸 매창과 넷째 아들 옥산 이우(李瑀)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준 높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가 현모양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출세, 자식을 잘 기르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그런 전근대적 여성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묻어두지 않았다. 뛰어난 회화 작품과 글씨 등 훌륭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우리는 사임당 신씨를 현모양처라는 강요된 이상적 여성상만이 아니라 한국 여성의 진취적 기상과 창조적 역량을 발휘한 근대적 여성성의 한 원형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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