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노동계의 충돌이 더욱 거세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다행히 화물연대의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정부와 경찰은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강공 일변도로 노동계를 밀어붙이고 있고 노동계도 점점 더 격앙되고 있다. 또 극단적인 대립들이 되풀이되고 안타까운 희생을 불러올까 걱정이다.
'고소영과 강부자'라는 비아냥으로 출발한 정부의 균형감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산적한 문제들을 푸는 데는 균형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균형감각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반대로 균형감각을 잃으면 반드시 저편으로 짙은 한숨과 눈물의 통곡 소리가 진동하게 되어 있다.
1945년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독일이 다시 일어설 때 손이 많이 필요했다. 독일은 195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유치했다. 터키와 폴란드 등지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갔다. 197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로 몰려갔다.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임금이나 노동시간 등에서 자국 노동자들과 거의 같은 조건으로 대우해 주었다. 당시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힘을 주었다. 이러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용기와 힘을 더해 독일은 독일국민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독일은 또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여 장학금을 대주고 공부를 하게 했다. 이 장학생들은 모두 자기 나라에서는 엘리트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독일 장학금으로 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이 모두 공부를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그 나라의 지도층이 되었다. 교수도 되고 장관도 되고 기업가도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을 공부시켜준 독일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고, 기술이나 자본을 유치하거나 교류협력을 할 때 모두 우선적으로 독일을 벤치마킹하거나 독일에서 영감을 얻고는 했다.
독일에서 일했던 한국 노동자들은 이국생활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독일에 대해 감사하고, 독일에서 공부했던 한국 지식층들 역시 독일에 대해 감사한다. 이런 방식으로 독일은 국제사회에서의 신인도와 위상을 높여 왔다. 게르만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다른 민족을 낮추어 보거나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신나치주의자들도 있지만, 독일의 정책은 한결같이 정당이나 파벌의 이익을 넘어 국가 전체의 지속적인 국익을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절대적 가난에서 벗어나 완전한 선진국 대열을 목표로 더욱 매진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빠른 성장, 여기에는 뛰어난 기업인들의 혜안과 함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깔려 있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말부터 노동력이 부족했고 동남아에서 노동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충분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말을 듣는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보는 독일의 안목과 균형감각이 부럽다.
BC 700년대 유대 사회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들 배만 생각하면서 예배만 반듯하게 바치는 사람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이렇게 꾸짖고 있다. "무엇 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 세상에 오신다면 옛날 유대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권력자들보다는 우선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나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지 않겠나. 예수님도 이렇게 선포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때가 지금이다." 과연 예수님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자 하셨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하셨고, 병자들, 고통받는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 '인간에 대한 연민'이 예수의 마음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전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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