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아름다운 바보, 노무현을 보내며

2002년 12월 19일. 그날 밤 나는 수성동 한 호프집에서 내 존경하는 소설가와 함께 술잔을 들이켜며 대한민국 최고의 빅 매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회창 VS 노무현. 자정이 가까워지고, 그의 믿기지 않은 승리가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린 경천동지한 듯한 기쁨에 들떠 온 세상이 떠나가라 노래 불렀다. 물론 대구는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절대적 상실감에 사로잡힌 대구 택시기사'와의 심야 난투극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고, '끝 모를 침울함에 빠져버린 아버지'의 얼굴은 치유가 불가능한 듯해 보였다.

그로부터 7년 후 오늘, 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를 애도하며 다시 그리스로마신화를 읽는다. 토머스 볼핀치가 쓴 이 책에 등장하는 열두 신들은 한결같이 인간을 닮았다. 절대적인 권위는커녕 질투와 시샘, 사기와 납치, 때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런 나약하고 모순투성이인 神(신). 그런 신들이 존재하였기에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었고, 결국 신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당당히 홀로 설 수 있었다. 본 회퍼의 '숨은 신'과 F. 니체의 '죽은 신' 역시 이들 못난 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인간에게 건네주었고, 헤라클레스가 신을 대신해 거인족을 물리쳤듯, 정치인 노무현은 대한민국에 희망을 선사했다. 당시 그가 보여준 정의와 원칙을 향한 도전과 열정은 분명 타 정치인들과 달랐다. 청문회 스타란 하나의 이벤트로서가 아니라 그가 걸어온 뜨거운 삶의 발자취, 그 지난했던 개인사는 우리의 상식을 압도했고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젊음에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2000년 4월,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뛰어든 그를 가리켜, '노무현은 바보다. 그러나 아름다운 바보다'라고 칭한 한 대학생의 말처럼, 우린 그렇게 서투르고 모난 인간에게 취했고 불안하고 가벼운 그를 아테네 광장 제일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

아테네 광장 제일 높은 곳에서의 그는 잘못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연대의 복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의지를 독단이라, 그와의 차이를 차별이라 단정 지었고, 그 독단과 차별은 결국 멸시로 이어졌다. 그는 고독했고, 따라서 인간적인 유대가 그리웠을 것이다. 퇴임 후, 가끔 막걸리 한 잔에 행복해 하는 그의 얼굴이 TV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난 나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작은 유대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주주의, 진보, 정의…….

그가 일평생 추구했던 가치들은 놀랍게도 그의 주변 인물들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 그의 도전과 열정은 부정되고 위선과 부패만이 그의 전부가 되었으며, 그의 반대편에 섰던 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연일 그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너희가 신처럼 추앙하던 저 인간마저 썩었으니, 우리의 썩음을 너무 탓하진 말라.' 그렇게 냉소와 패배의 동굴 속으로 내몰린 보통 사람들은 반칙과 불신, 자괴와 혐오만이 가득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 다시 어둠과 소통하여야 했다. 막장 복수극에 휩쓸려 타인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어둠을 자위하고, 타인의 어둠을 들추어 자신의 어둠을 정당화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한 번 세상과 단절되었고, 뜻밖의 자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아테네 광장이 파르테논 신전이 아니듯, 우린 그에게 신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역시 '어둠의 노예이자 빛의 충복',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남자의 아버지였을 뿐이다. 全知(전지)하지 않기에 실수와 죄를 피할 수 없었고, 全能(전능)하지 않기에 좌절과 그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껴안아야 했다. 그것은 결국 인간임으로 인해 맞이해야 할 절대적인 운명이었다. 하지만 난 오늘 그 숙명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꿔본다. 인간은 신과는 달리 결코 '唯一(유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그를 보내고 그보다 더 바보 같은, 더 아름다운 바보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빛이 영원하지 않듯 어둠 역시 恒久(항구)하지 않기에.

우광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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