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DJ의 박정희 콤플렉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소련군 참모총장으로 일찍부터 '탱크와 장갑차량, 대규모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엄청난 속도로 진격해 적을 격파한다'는 군 현대화 개념을 창시한 천재적 군인이었으나 1937년 6월 독일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그의 숙청으로 소련군 현대화는 뒤로 미뤄졌고 1941년 독일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독일군이 선보인 電擊戰(전격전)은 투하체프스키의 군 현대화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투하체프스키의 숙청 이면에는 그의 스타성에 대한 스탈린의 콤플렉스와 시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투하체프스키는 모친이 대문호 톨스토이와 닿아 있는 명문 귀족 출신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와 음악적 재능은 전문가 못지않은 경지였다. 미남이어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가난한 주정뱅이 구두수선공 아들인 스탈린으로서는 콤플렉스를 가질 만했다.

그는 1920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발군의 용병술과 작전계획으로 승승장구하며 천재적 전략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바르사뱌 함락 직전에 후퇴해야 했지만 그 이유는 그의 정치장교였던 스탈린이 지원군 파견 요청을 교묘히 묵살했기 때문이었다.('질투의 세계사' 야마우치 마사유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이런 종류의 콤플렉스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주어진 과제는 크게 보아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경제부흥과 민족통일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전자를 선점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7명의 새로운 대통령이 나왔지만 '박정희 모델'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내놓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름의 정책이 제시됐고 성공했지만 기본틀은 박정희가 만든 것이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수출 주도형 아시아 발전 모델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 모델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뜻한다.

DJ로서는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4억5천만 달러를 김정일에게 갖다 바쳤다. 명예에 대한 병적인 집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돈으로라도 명예를 가져야겠다는 이 같은 욕심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DJ가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 같은 찬사를 박정희에게 선점당한 것을 얼마나 아깝게 여길지 상상할 수 있다. 그가 자동차 공장, 포항제철 설립,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밑바탕이 된 정책마다 반대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보면 결국 '햇볕정책'은 아무리 잘해도 경제 분야에서는 박정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절망감의 심리적 대체물 또는 경제부흥은 박정희에게 선점당했으니 민족통일 분야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명예욕의 산물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개념 자체가 조잡했다. 포용하고 지원하면 따뜻한 햇볕에 나그네가 외투를 벗듯이 북한이 개방으로 나올 것이라는 발상은 참으로 童話的(동화적)이다. 지난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이 말해 주듯이 북한은 햇볕정책과 상관없이 일관되게 핵 개발을 추진해 왔다.

더 큰 비극은 핵무장이라는 김정일의 의도가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이를 보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햇볕정책의 설 땅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꼬이자 DJ는 남한과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사태가 이 지경에 왔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햇볕정책은 김정일의 의도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김정일의 선의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파탄을 맞은 것이다.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지금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처지인 햇볕정책도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다. 미래의 역사책이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DJ의 햇볕정책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 콤플렉스와 명예욕이 빚은 해프닝이었다"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정경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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