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부터 '그림만' 그렸다는 작가 하은미(28)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영화에서 봤는데, 자기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더군요. 아직 걸음마를 떼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잘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봉산문화회관에서 28일까지 열리는 하은미 개인전의 제목은 '구겨짐'이라는 뜻의 'RUMPLE'(럼플)이다. 전시회 팸플릿을 보면서 구겨진 잡지 표지를 정교하게 묘사해낸 실력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찢어지고 구겨진 대중 잡지가 주는 느낌은 다소 엉뚱하지만 '참 예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쁜 그림을 그리려면 다른 대상도 많은데 왜 하필 구겨진 잡지를 택한 것인지 궁금했다.
이 때문에 전시 준비에 한창이던 작가를 만나 던진 첫 질문도 "왜 구겼냐?"는 것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나니 마치 추궁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은미는 익숙하다는 듯이 답했다. "잡지나 신문은 정보를 주는 중요한 매체인데 한 번 보고나면 버려지는 일회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겨지고 찢겨진 것도 예쁜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화가로서 의무라고나 할까요." 외국 잡지만 그리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솔직히 말해서 한글을 회화적으로 구현하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우며, 아직 국내의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며 "작품 대상이 된 잡지는 색채가 예쁘거나 담고 있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하은미는 다분히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한다. 네모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구겨진 잡지의 모양 그대로 캔버스를 변형한다. 벽면에 붙은 작품을 보고 있으면 구겨진 잡지를 그대로 붙여놓은 느낌이다. 크기는 실제 잡지의 수십배에 이른다. 잡지 표면이 주는 매끈함을 살리기 위해 캔버스 대신 매끈한 아크릴판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두꺼운 두 겹의 아크릴판 위에 밑그림을 그려서 구겨진 잡지 모양대로 아크릴판을 오려내고, 그 위에 다시 미세한 흠집을 내서 물감을 입힌다. 쉽게 마르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이 이어진다. 한 번에 색을 입히기 보다는 엷게 수차례 바르는 방식이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잡지 표면의 매끈함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아울러 멀쩡한 캔버스에 멀쩡한 잡지 표면을 그려놓고는 뒤늦게 캔버스 자체를 구겨버린 작품도 선보였다. 말 그대로 '구겨짐'이다.
하은미의 작품은 실제로 봐야 한다. 팸플릿 사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벽면 전체를 장식한 거대한 크기의 찢어진 잡지는 찢겨나간 조각 조각들까지 생생하게 재현한 높은 완성도를 통해 관객을 압도한다. 아직까지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다는 작가는 "언젠가 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겠죠"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신감 넘치는 신진작가 하은미의 다음 전시가 벌써 기대된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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