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 낙동·백두를 가다](26) 영남의 으뜸 고을 상주(2)

과거급제 68명 배출한 '왕산'의 정기 도도히…

상주박물관은 삼백의 고장인 상주의 생활상을 재현해 관광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상주박물관은 삼백의 고장인 상주의 생활상을 재현해 관광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상주는 한동안 무척 들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경북의 새 도청 유치 경쟁에서 이웃인 안동과 예천에 석패했다. 경북도민들의 입장에선 도청이 어딜 간들 어떠냐라는 반응이겠지만 상주는 새 도청을 유치하지 못한 아쉬움이 무척 오래갔다.

지금이야 상주는 낙동강 시대를 맞아 경북의 새 천년을 여는 중심 도시로 자리잡고 있지만 도청을 유치하지 못한 아픔, 아니 상주인의 입장에선 도청을 되찾아오지 못한 아쉬움이 쉬 사라지지 않는 듯 했다.

일행은 그 아쉬움의 이유로 옛날부터 영남의 으뜸 고을 상주가 상주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행은 상주의 자존심, 역사 으뜸 의식을 이미 '3국의 왕을 배출한 상주'에서 톡톡히 경험했다. 이 뿐이겠는가.

상주시내 한복판에는 산이 하나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인다. 왜? 키가 70m에 불과하다. 어찌보면 산 같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왕산(王山·임금의 산)이자 상주시 중앙부에 위치한 영산(靈山)이다. '왕산'이란 이름은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대궐에 임금이 계시는데 한 고을에서 '임금 왕(王)자'를 쓸 수 있겠는가?

상주의 왕산은 예사 이름이 아니듯 그에 걸맞은 역사를 지녔다. 상주의 정신이 깃든 이 조그마한 산은 주변에 키가 10배나 되는 삼악(석악-천봉산, 노악-노음산, 연악-갑장산)을 거느렸고, 이것도 모자라 이수(二水·북천과 남천으로 상주의 낙동강 지류)도 꿰찼다. 삼악과 이수의 입장에선 왕산은 '품은 알' 같은 귀중한 산인 것이다. 왕산은 사방이 숲에 싸였고, 정상은 펀펀한 흙마당이었다. 특히 남쪽 산자락엔 수백 년 묵은 고목이 울창해 자연 정자를 이루고 있으니 옛날 영남 제 1의 객사인 상산관과 함께 관리나 선비들의 시회(詩會)의 공간이었다. 전국 최고의 시문학이 꽃핀 곳인 셈이다. 영남 으뜸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도 조선 말기까지 바로 이곳 왕산에 있었다.

왕산은 일명 장원봉(壯元峰)이라고도 한다. 그 연유는 이렇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68명이나 되는 상주 선비들이 문과에 장원을 비롯해 급제하였기에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임란 때 왜병들이 산 정상을 허물고 누각을 지어 정기를 끊어놓은 뒤로부터는 40여년 간 급제자가 1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기가 빠지면 시들시들하듯 산 또한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요즘은 없지만 상주 사람들은 왕산을 앙산으로 부른 적이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단골 메뉴인 '일제'와 얽힌 이야기다. 일제는 왕산의 명칭이 얼마나 거슬렸기에, 상주의 역사적 우월성이 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산을 앙산으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당시 '왕'은 엄연히 일본 천황뿐인데 식민지 조선의 땅 상주에서 왕산을 쓰고 있음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거슬렸을 것이고, 그래서 시내 중심에 있으니 가운데 '앙(央)'자를 써 '앙산'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를 지난 1995년 상주시 지명유래위원회에서 다시 '왕산'으로 그 이름을 당당히 회복시켰다. 아무리 역사를 왜곡한들 그 진실은 결코 감출 수 없다. 일행은 상주의 왕산에서 '뿌리',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이 담을 수 있었다.

왕산과 그 주변의 역사 유적·유물을 둘러본 뒤 상주의 또 다른 역사 자존심을 찾아 나섰다. 바로 상산관 건너 편에 자리한 복룡동 주택건설지구 내 방리(坊里) 흔적이다. 방리는 일종의 고대의 번창한 마을로 지금으로 치면 계획 도시라고 할까.

지금까지 상주의 방리에 대한 연구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가로와 세로 각각 160m를 한 개의 방으로 해 상주의 방은 남북 약 1천440m, 동서 약 1천560m로 각기 45방씩 모두 90방이 존재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경주(왕경)는 360방으로 상주는 경주의 4분의 1 정도의 규모인 셈이다. 상주는 당시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비견해 그 규모는 작지만 신라 때부터 고도(古都)의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으니 상주의 또 다른 자존심으로 내세우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는가.

상주는 '태생'부터 다른 고을과 남달랐다. 낙동면 신상리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가 있고, 병풍산 일대에는 고대 고분군이 즐비하다.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던 시기인 기원 전후 상주는 사벌국이라는 고대 성읍국가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걸었다. 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작지만 '왕의 역사'가 상주의 본격적인 출발이라고 했다.

3세기 왕의 나라 상주는 신라의 장수 석우로에게 패망, 신라의 한 주(州)가 됐다.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상주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고, 김유신이 상주행군대총관으로 상주에 머물렀다. 인기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화랑 용화향도는 지금의 화북면 용화동 일대에서 김유신이 중심이 돼 활동한 화랑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화랑으로 성장해 삼국통일에 기여했다. 상주는 7, 8세기를 거치면서 신라 9주의 하나로 경주에 이은 통일신라 제2의 도시였다. 당시 상주는 10군과 30현을 관할했다. 지금으로 치면 그 영역은 상주는 물론 안동과 청송군 일부, 예천·풍기·영주·영동 이남, 의성·군위·선산·문경·김천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국가를 거쳐 신라의 으뜸 도시였던 상주는 고려에도 으뜸 역사를 이어갔다. 10세기 고려 성종 때 상주는 '영남의 탄생지'였다. 당시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영남도, 영동도(경주), 산남도(진주)로 분할했고, 이때 상주를 영남도라 불러 영남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고 한다(세종실록지리지). 11세기 고려 현종 때는 전국 8목 중의 하나로 상주목이 설치됐고, 전국이 5도 양계로 나눠졌는데 경상도를 경주의 머릿글자 '경'자와 상주의 '상'자를 따 경상도라고 했다. 경상도의 탄생지 중 한 곳이 상주인 셈이다.

조선에 들어서 상주는 명실상부 지금의 도청 소재지인 경상감영이 설치된다. 경상감영의 첫 설치 시기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조선 건국과 함께 경상감영이 경주에서 상주로 옮겼다. 이후 1593년 선조가 감영을 성주에 임시로 옮기기까지 200년간 조선 팔도 중 가장 규모가 큰 경상도의 '수도'가바로 상주였다. 영남의 젖줄이자 한반도를 가장 대표하는 낙동강이라는 이름의 탄생지도 상주인 것을 보면 상주가 영남의 으뜸 고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상주는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영남의 으뜸 고을이자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상주를 드나드는 길목마다 대형 광고판부터 눈에 들어온다. 대개의 시·군은 '○○의 고장, ○○'식이다. 하지만 상주는 '명실상주'다. '명실상부' 영남의 으뜸 고을이라는 자부심이 아닐까.

이종규기자 상주·이홍섭기자 사진 윤정현

조희열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곽희상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강경모 상주향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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