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소통에 대하여

예전에 한 사진작가와 인터뷰하는 중에 자동차의 위압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며 작업 의도가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다. 남성미'폭력성'중후함 외에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등 나름대로 예상 답안을 생각했지만 작가는 엉뚱하게도 "그냥 멋있어서"라고 답했다. 그뿐이었다. 얼마 전에 한 화가를 만나 예쁘게 채색된 자동차 그림을 그린 이유를 묻기도 했다. '예쁘고 깜찍한 느낌이 좋아서'라고 답할 줄 알았더니 뜻 밖에도 "가지고 싶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욕망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작가들을 만나 작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답답할 때가 있다.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갖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마저 든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너무 말이 많거나 너무 적어서다. 어느 경우든지 탓할 바는 아니다. 말이 많은 것은 행여 자신의 작품이 잘못 해석될까 걱정스럽기 때문이고, 말이 적은 것은 작업실을 떠난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오해의 위험을 안고 있다. 말이 많다 보면 '꿈보다 해몽' 격의 작품 설명이 될 수 있고, 말이 적으면 '빛 좋은 개살구'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을 다소라도 줄여보고자 글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바로 평론이 존재하는 이유다. 행여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느낌이 어긋나지 않도록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보다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작가와 대중이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작품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올바른 이해을 돕는 것은 평론의 몫이다.

하지만 일부 평론은 작품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평론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등장하는 단어와 표현의 이질감은 극복하기 힘든 대상이다. 작가와 관객와의 소통이라는 대전제는 사라지고,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로만 남아버렸다.그나마 실낱같이 이어지려는 작가와 관객의 소통마저 끊어버린다. 게다가 건전한 비판을 담은 평론을 만나기도 쉽잖다. 물론 힘들게 만든 작품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건전한 비판이라는 '쓴약'을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풍토가 됐다.

미술 이야기를 길게 꺼낸 이유는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평론을 말하기 위함이다. 사설과 논평, 성명서와 선언서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진행 중인 정치'경제'사회적 현상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부 평론과 많이 닮았다. 이리 꼬고 저리 접어서 말 잔치로 끝나는가 하면, 현상의 본질은 온데 간데 없고 온갖 주장만이 가득하다. 아침에 신문을 보고 하루 종일 욕을 했더니 저녁에 방송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미술 작품 하나를 글로 옮기는데도 그토록 노력이 필요한데,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땀과 피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저리 쉽게 말할 수 있는지 섬뜩할 정도다. 그 말들의 잔치를 한 꺼풀 벗겨내서 알맹이만 담아보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온갖 근거를 들이대지만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다. 코끼리라는 본질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는 식이다. 그저 무지해서 그렇다면 측은함이라도 들겠지만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왜곡은 불쾌함을 넘어서 분노를 낳는다. 중립의 가치가 비겁함으로 호도되는 세상이다. 객관은 주관의 탈을 쓰고 위장전술을 펴며, 대의 민주주의는 이기주의에 발목이 잡혀 한걸음도 못 떼고 있다. 작품은 말 없이 걸려있는데 사방에서 스피커 소리만 시끄럽다. 관객은 이제 등을 돌리려 한다.

김수용(문화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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