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최고 문장가인 月象谿澤(월상계택) 가운데 한 사람인 택당 李植(이식)은 자손들에게 책 읽기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남겼다. '먼저 시경과 서경을 100번 읽어라. 논어와 맹자는 숙독하면서 100번 읽고, 중용과 대학은 횟수 제한 없이 아침저녁 읽어라. 소학은 날마다 실행에 옮기고, 사기와 한서를 100번 읽어라. 이백'두보'한유'소식의 칠언시는 항상 읊어라….'
유지의 일부만 옮겼는데도 질릴 정도다. 아무리 옛 공부라도 폭과 깊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넘어야 가능할 듯하다.
오늘날의 공부가 옛 공부에 비해 얼마나 어려운지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요즘 정부가 하는 양을 보면 택당이 혀를 찰 듯하다. 정부는 청와대에 보고한 미래형 교육과정 개편 방안의 주요 내용으로 2014학년도 수능부터 사회'과학탐구 영역의 응시 과목 수를 지금보다 2과목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학생들의 학습량을 줄이겠다는 뒤집힌 판단을 앞세웠다. 불과 몇 년 전 언어와 수학을 선택과목으로 바꾼 '2+1' 수능을 내놓았다가 대학들이 외면해 1년 만에 유야무야된 경험을 그새 잊은 걸까.
이명박 정부 교육 정책은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사교육비 절감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잡은 건 국민의 주머니 사정을 호전시켜 인기를 얻겠다는 포퓰리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너무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판이다. '구구단 외기' 하나로 대학입시를 치른다고 해도 '틀리지 않고 빨리 외우기' '9단부터 외우기' '10단, 11단으로 응용하기' 등 수십 개 과목을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우리 사교육이다. '틀리지 않게' '개인별 특성에 맞게' 지도하는 족집게 강사를 어떻게든 찾아내는 게 우리 학부모들의 교육열이다.
어려운 싸움일수록 정공법이 해답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의 본질을 건드려야 한다. 성취도평가의 결과를 토대로 개인별'학교별 개선책을 만들고, 객관적인 교사 평가를 시작하고, 지역'학교'학생 특성에 맞는 교육이 이뤄지도록 자율성을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고통스런 수술과 강력한 처방전이 있어야 묵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그 때쯤에는 사교육과의 싸움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김재경 사회1부 차장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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