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로는 대구읍성의 서쪽 성벽을 헐고 낸 신작로이다. 약전골목의 끝인 약령서문(藥令西門)에서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이 있는 네거리까지를 말한다. 옛 조흥은행 앞 네거리 위치한 달서문은 공북문'진동문'영남제일관과 함께 대구읍성의 4대문 중 하나였다. 또한 달서문으로 나가 300m 거리에 조선의 3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던 서문시장이 있었다. '달서문 밖에 있는 시장'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렀고, 그 앞으로 유기와 채소를 파는 난전이 형성돼 있었으며, 달서교를 건너서 서문시장으로 갔다. 그와 함께 서소문이 있었는데, 달서문의 보조문으로 지금의 남국산부인과의원 남쪽에 있었으며, 서야문(西也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신로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오른쪽에 은사관(恩賜館)이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황제가 내린 하사금으로 지은 공공집회장 건물이었다. 또한 대구은행 서성로지점 자리에 우현서루(友弦書樓)가 있었다. 근대초기 민족지사를 양성하던 곳으로 이상화 시인의 큰아버지인 이일우가 맡아서 운영했으며 191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다. 그 뒤 강의원(講義院)으로 바뀌었고, 1921년 교남학교(嶠南學敎)를 설립하였으며, 뒷날 대륜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우현서루보다 1년 늦게 달성여학교가 교사 낙성식을 가졌다. 설립된 지 1년 만에 학생이 50명에 이를 정도로 커졌고, 낮 시간에 공부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임시로 야학을 개설하였다. 그와 함께 소남 이일우의 며느리인 이명덕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싯달유치원을 열어 유아교육에 이바지했다. 그는 이상화 고택으로 복원해 놓은 계산동 옛집의 소유자였다.
예전 서성로 부근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이상화의 부친 이시우, 백부 이일우, 시인 이장희의 부친 이병학의 옛집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상화의 네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지금도 안쪽 골목에 남아 있는 큰 집채들과 붉은 벽돌 담장의 흔적은 부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짐작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경상감영의 옥터가 있던 자리에 서문로교회가 들어섰다. 또한 서신로 네거리에는 대구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동원예식장(지금의 일산빌딩 자리)이 있었으며, 백년설과 심연옥이 결혼식을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따라서 서성로도 많이 달라져서 지금은 '돼지골목''깡통골목'으로 불리고 있다. 그 까닭은 6'25전쟁 이후 돼지고깃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돼지골목'으로, 그 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이나 드럼통을 재생하여 파는 상점이 들어서면서 '깡통골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또한 서문로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철물점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해서 오늘날 자연스레 철물'함석'배관'공구를 취급하는 가게들이 모여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우중충한 느낌이 든다.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궁핍했던 시절의 낙후된 모습을 정리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환경을 바꿔나가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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