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민화가'로 이름을 떨친 정선(鄭敾)은 밀려드는 그림 청탁을 피해 50대 후반에 청하현감을 자청한다. 이미 천하를 주유하면서 곳곳에 족적을 남겼던 그는 내연산을 둘러보고 비경에 감탄한다. 며칠 후 겸재는 노복을 대동하고 청하골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작품이 '내연삼룡추도'(內延三龍秋圖). 정선과 동시대 왕이었던 숙종은 미행(微行)을 즐겼던 왕으로 유명하다. 숙종의 민정감시 발길은 1천리 길 청하현까지 미쳤다. 청하골을 관광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왕은 낮에 본 내연산의 비경이 눈에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한밤에 일어나 한시(漢詩)를 써 청하에서의 감동을 기념했다. 최고의 화성(畵聖)이 화구(畵具)를 챙겨 부랴부랴 나선 곳. 지존의 군주가 천리 길을 달려 찾아왔던 곳. 내연산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내연산에서는'지우개 찬스'
내연산은 국립, 도립 같은 공인(公認)요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주변 30, 40분 거리에 산'계곡'온천'바다'수목원'사찰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첫 산행길이라면 과감히 다른 카드를 모두 지우고 계곡산행에 '올인'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정상석을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A형'성격의 산꾼이라면 내원산이나 향로봉 중 한곳에서 '등정의례'를 마치고 바로 계곡으로 내려오면 된다. 취재팀 등산 들머리는 하옥리~삼지봉코스로 잡았다. 향로봉을 거쳐 삼지봉(내연산) 등정 후 초막골로 내려와 계곡으로 진행하면 계곡'산'폭포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내연산 수목원을 거쳐 상옥리, 하옥리에 이르렀다. 상옥마을이 끝나는 가 싶더니 비포장 흙길이 나온다. '세상에! 공업도시 포항의 뒷마당이 흙길이라니….' 버스는 흙먼지를 날리며 하옥방면 산길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갑자기 차안에서 "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길옆 낭떠러지 아래로 흙먼지를 뚫고 수정처럼 맑은 계곡이 살짝 속살을 드러낸 것이다. 이 하옥리 계곡은 북쪽으로 뻗어나가 옥계계곡과 만난다.
#계곡따라 폭포 장쾌한 도열
하옥리에서 향로봉에 이르는 길은 급경사길. 이번 등산의 최고 난코스다. 웬만한 준족들도 서너번은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신록을 따라 1시간 30분쯤 오르면 향로봉 정상이다. 향로봉에서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보통 한 능선 안에 산군(山群)이 있으면 보통 최고봉에 주봉자리를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향로봉(930m)을 제치고 220m나 낮은 삼지봉(내연산'710m)에 주봉을 내주었다. 흔치 않는 일이다.
아마도 삼지봉이 향로봉, 문수산 사이에서 중심축 역할을 하는 데다 동쪽으로 동대산을 이어주는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행은 내연산 정상석을 확인하고 바로 초막골 하산로를 찾았다. 내연산 등산의 하이라이트인 12폭포 산행을 위해서이다. 1시간쯤 걸었을까 '쏴아~' 하는 물소리가 이마의 땀을 쓸어낸다. 12폭포의 중심인 연산폭포가 일행을 맞는다.
명품 폭포들의 장쾌한 도열과 청류(淸流)를 따라 펼쳐진 원시비경은 이곳 산행의 압권이다. 형상으로 존재를 말하는 자연에서 비교는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나 연산폭포는 전국의 유명 폭포와 비견할 만했다. 우선 아찔한 협곡을 배경으로 한 긴장감 있는 배치가 가장 큰 특징. 폭포 주변은 온통 기암기석이 수직 절벽을 이루고 있다. 그 좁은 틈새를 옥류가 힘차게 낙차해 큰 소(沼)를 만들었다. 상생폭포'보현폭포'잠룡폭포 등 이웃한 폭포들은 비취색 물빛을 같이 나누며 황홀한 폭포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영화'남부군'촬영지로 유명
청하골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사실. 이곳이 바로 영화 '남부군'의 촬영지다. '남부군'에서 빨치산들의 목욕신이 두 번 나온다. 첫번째가 거창 금원산 유안청 폭포를 배경으로 한 집단 목욕장면이고 두 번째가 바로 청하골의 잠룡폭포를 배경으로 한 목욕신이다. 생의 대부분을 전투, 도피로 일관했을 이들에게 개인위생은 호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리산의 수많은 후보지를 제치고 청하골을 촬영지로 정한 이유는 이곳의 풍광과 가치를 높게 샀기 때문일 것이다.
산꾼들은 내연산에 일종의 중독성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 근처 어디든 한번 발을 디디고 나면 반드시 다시 찾게 된다는 흡인력 같은 것 말이다. 보경사는 청하골을, 청하골은 내연산을, 내연산은 천령산을, 천령산은 동대산을 낳고 이렇게 끌려 다니다 보면 어느덧 주변의 산을 완주하게 된다. 일부 산꾼들만의 얘기일까? 올여름 '내연산 백신'을 한대 맞으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취재지원 산앙산악회 053)558-0080.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