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히 박힌 점들은 선으로 이어지고, 가로와 세로를 달리는 선은 면을 채우며, 다양한 각도의 꺾임을 반복한 면은 공간을 창조한다. 그리고 공간은 다시 면·선·점으로 분해되며 무(無)로 돌아간다.
가느다란 금속 선을 연결해 잎사귀와 항아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작가 정광호(51)의 작품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한순간에 포착한 듯 허무하고 이채롭다.
작가 스스로는 이를 '비(非)조각'이라고 일컫는다. 점과 선에서 시작해 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회화적인 작업이지만 다시 면들이 만나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은 조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각은 텅 비어있고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듯, 흔적만 남은 듯 공간을 구성하는 점과 선의 얼개만이 보일 뿐이다. 조각인 듯 조각이 아닌 비조각으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는 "지금까지 내가 만들고자 한 것은 사물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물과 이미지를 떠나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곧 사물과 이미지 사이로 좁혀 들어가는 것이라고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항아리를 만들었으되 항아리가 아니며, 그렇다고 항아리가 아니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뜻이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실체와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깊이 있는 철학적 담론 속에서 작가는 '비조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통해 나름의 답을 찾은 셈이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부산·대전시립미술관, 경주 아트선재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소장돼 있다. 정광호의 작품은 석갤러리에서는 15일까지 전시된다. 053)427-7737.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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