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무렵 한국과 일본의 기술 수준 차이를 비교할 때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이야기가 있다. "한국은 볼펜 핵심 부품인 볼 하나를 못 만들어 일본에서 전량 수입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 비해 한참 뒤처지는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을 비유할 때면 어김없이 나온 단골 레퍼토리였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볼펜을 만들었다는 한 회사에 물어봤다. 이 회사가 볼펜을 첫 생산한 것은 1963년. 처음 몇 년 동안은 일본에서 볼펜 볼을 수입했지만 곧바로 국산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80년대에 대학에 다녔으니 그때 당시에도 일본에서 볼펜 볼을 수입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담이지만 이 회사가 처음 만든 볼펜의 제품 이름인 153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직원이 귀띔해줬다. 이 볼펜을 첫 판매할 때 가격이 15원이고 회사에서 만든 세 번째 제품이어서 153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곁들여 베드로가 그물을 던져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라는 데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화투 도박의 일종인 속칭 '구삐'를 칠 때 좋은 패인 1+5+3에서 연유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등 국가고시 2차 시험이 몰린 6월 한 달 동안 서울 관악구 신림동'봉천동 일대 문방구에서 1천 원짜리 국산펜이 품귀현상을 빚었다. 주관식인 2차 시험을 앞두고 여분의 펜을 사두려는 고시생들 때문에 펜이 동났다는 것이다. 일본펜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국산펜이 차지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저렴한 가격에 품질은 일본 제품에 뒤지지 않으니 일본펜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매출 400억 원 남짓한 중소기업이 5억 원이란 거액을 들여 2년여에 걸쳐 연구개발한 끝에 내놓은 제품이라고 하니 그 회사에 큰 박수를 보낸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크고 높은 것을 추구하지만 세상은 결코 그것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작고 낮은 것에도 진리가 담겨 있고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는 것이다. 볼펜 볼 하나를 국산화하고, 일본펜을 능가하는 국산펜을 땀 흘리며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한다고 믿는다. 거창한 구호나 이념에 매몰되기보다는 작고 소박하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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