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이것만은 남기고 가야지

"나이는 자연이 가장 공평하게 주는 혜택"

■ 이응수 지음/말·글·빛냄 펴냄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할 일이 그렇게 됐을 때, 우리는 쓴웃음 짓거나 한숨 쉰다.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안 됐을 때 하염없이 걷거나 눈물짓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어 감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는 것, 그리고 끝내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긍정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사람살이임을 안다.

처음부터 자기 인생이 엑스트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엑스트라로 출발했지만 언젠가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꿈이다. 이름도 날리고, 돈방석에도 앉아보고 싶다. 무거운 깃발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주인공이 탄 말의 발굽에 치이기도 하고, 장꾼이 되어 비린내 나는 고등어를 한 손에 들고 왔다갔다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엑스트라로 연기 생활을 마감한다.

엑스트라로 연기자 생활을 마감하는 사람들. 그들이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기 딴엔 죽을 힘을 다해 뛰어다녔지만 재능이 좀 부족했고, 밀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운이 없었다. 하긴 인생에는 운이 중요하고, 밀어주는 사람도 중요하다. 어쩌면 재능이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들면서 그것을 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것들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 생각하니 억울하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인생임을 알고 나면 그저 허허 웃음이 날 뿐이다. 세상이 어디 정직과 성실만으로 살아가는 곳인가. 정직하고 성실한 땀을 흘린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세상은 초등학교 시절 도덕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세상이다.

이 책 '이것만은 남기고 가야지'는 일선에서 은퇴한 지은이가 일상을 일기처럼 써내려간 수필집이다. 자식들 눈에 비친 아버지의 초상, 4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간의 사랑과 전쟁, 이제 반쯤은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들의 일상과 일탈, 사회에서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 등을 담백하게 적고 있다.

'지금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 내놓아도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 버스 안에서 내 옆자리가 비어도 누구도 내 옆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가끔 거울을 통해 내가 내 모습을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꼴인데 누가 내게 관심을 둘 것인가.'

이 부분을 읽으며 기자는 오래 전 난전에서 오이와 배추, 상추를 팔던 한 노인을 생각했다. 80을 바라본다는 그 노인은 '나이를 먹을수록 장사가 안 된다. 사람이 늙으면 배추도 늙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배추 한 포기를 사도 젊은 사람이 파는 것을 사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설마 그러려니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말임을 세월을 따라 알게 됐다.

'중·고등학교 동기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세상을 등졌다. 그들이 건강을 안 챙겨서 떠난 게 아니다. 그쯤에서 떠나는 게 자연의 법칙이고 그걸 통섭으로 보면 된다. 아름다운 꽃도 열매가 맺으면 떨어지게 되어 있고, 쪽으로 빚어 심은 씨감자도 새 감자가 나오기 시작하면 썩기 마련이다. (중략) 그럴 나이가 됐는데, 어떻게 우리 인간만이 그 틀을 벗어나보겠다고 발버둥이란 말이다. 턱도 없는 소리다.'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 이치를 긍정하는 말이다. 일찍이 부처님을 비롯해 많은 현자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를 알고 긍정했다. 부처님이나 현자가 아니더라도 한 인생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그 이치를 알고 긍정하는 모양이다. 지은이는 이 책 곳곳에서 '나이 들고 병들고 이별하는 이치'를 긍정하고 있다.

'4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돌아보니 웃는 날도 있었지만 그늘진 얼굴로 산 날이 훨씬 많았다. 생각해보면 푸지게도 아옹다옹했고 거기서 벗어나려 몸부림도 쳤다. 고부의 갈등으로, 형제 간 부조화로, 자식들에 대한 불만으로, 그 끝은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 부부의 불협화음 난조로 나타났다. 이혼이란 말을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내뱉으며 지낸 일도 있었고, 한 집에 살면서 열흘이 넘도록 아이들 통역(?)으로 지낸 날도 있었다. 부부는 함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목표가 같은데도 감정의 차이, 처신의 차이, 방법의 차이 때문에 지지고 볶는다. 제 감정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부부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어떻게 완벽함을 바랄 수 있을까. 삐걱거릴 때마다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쳐 조율해야지. 평생 그렇게 살아야지….'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가훈을 지어 붙이려고 자식들을 불러 물었더니 '요새도 가훈 같은 거 걸어놓는 집이 있습니까? 개인의 창의성에 영향을 준다고 회사에서도 사훈을 없앤다고 하던데요. (중략) 뭐, 아버지 좋도록 하이소.' 라며 결론짓는다.

'아버지 좋도록 하이소.'

다 큰 자식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버지 좋도록 하이소'라고 하는데 밀어붙일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늙은 아버지는 '자기네들 의견을 충분히 전했으니 결정은 나더러 하라는 그 말에 울컥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지은이 이응수는 '인생은 40부터도 아니요, 40까지도 아니다. 어느 나이든 살만하다'는 피천득의 수필을 인용하며 '나이는 자연이 가장 공평하게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며 은총이다.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불가항력이다. 불가항력 앞에 자구책이란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지는 명분을 찾는 길밖에 없다. 신록의 아름다움이 있으면 단풍의 아름다움도 있다. 뜨는 해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는 해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은퇴한 지은이는 특별히 할 일 없는 날 금호강가를 산책하곤 했다. 거기서 아예 '텐트'를 치고 낚시하던 한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그 노인은 아예 강가에 임시 거처를 짓고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낚시하던 노인이 '인자 이 짓도 몬 해묵지 싶습니다'라며 푸념한다.

늙어가는 처지를 원망하는 말인가 싶어 지은이는 '나이 앞에 장사 있던가요?' 라고 위로했다. 늙은 낚시꾼은 '나이야 내 묵은 거이까 그렇다손 치고, 어느 눔이 찔렀는지 우쨌는지 모르지만, 추석 전으로 이걸 다 뜯어라 카는 구만요. 나한테는 이기 집인데. 허허허'라고 말한다.

'나이야 내 묵은 거이까….'

낚시하는 노인의 말이 짠하다.

343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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