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25. 태평로

태평성대를 바랐지만 세월은 그렇지 못했다

태평로는 대구역 앞의 좌우 큰길을 말한다. 대구역은 우리네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던 이별의 장소였다. 해방이 되자 그 같은 아픔에서 벗어나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태평로라 이름지었으나 세월은 그렇지가 못했다. 1950년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별의 슬픔을 나눠야 했을 뿐 아니라, 피란온 사람들이 대구공회당에 임시 수용됨으로써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식민지 자본이 제일 먼저 차지한 곳. 1903년부터 경부선 철로 공사를 위해 대구역 앞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회사와 노동자들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철도 공사가 끝난 뒤에도 노동자들은 거류민회를 조직해 철도의 부대시설과 상점을 열었으며, 1913년경 정거장 확장을 위해 환수되었다.

1910년대에 들어 대구역을 중심으로 좌우에 신작로가 개설됐다. 그 뒤 1930년대에 들어 대구역의 서쪽을 금정(錦町), 동쪽을 행정(幸町)으로 나누었고, 금정 쪽에는 철도'운송'석유'곡물'무역'물류'호텔 같은 회사와 상점, 그리고 공회당 같은 문화공간이 들어섰다. 또한 행정 쪽에는 조선 철도회사'상품진열소'우체국'여관'택시'버스회사'석탄창고 같은 회사들이 들어서 미창(米倉)을 통한 곡물 수송과 대한통운의 전신인 마루보시(丸星)를 통해 우리나라의 물류를 장악했던 기업들이 지금의 태평로 1, 2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구역은 1904년 대구정거장으로 개설되었다. 그 뒤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대구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정월에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황제가 임시열차로 대구역에 도착하였고, 환영 나온 사람들의 '만~세' 소리를 들으며 지붕 없는 가마로 시가지 순시를 하였으며, 다음날 달성토성을 방문하고 기념 식수를 하였다.

1913년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목조 2층의 역사가 완성됐다. 당시 지방 철도역으로는 부산과 신의주 다음으로 규모가 컸을 뿐더러 제대로 격식을 갖춘 역사였다. 해방 후에도 민중집회나 선거 유세장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다가 1978년 역사를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었으며, 2002년 민간자본으로 지금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대구시민회관의 옛 이름은 대구공회당이었다. 1913년 중국인 모문금이 평양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지었다. 건물 내부에는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회의실과 귀빈실, 오락실과 식당을 갖춰 공식행사와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17년 작곡가 박태원이 대구 최초로 합창 발표회를 가졌고, 1931년 권태호의 독창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1940년 조선방송협의회 대구출장소로 첫 방송을 시작하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 대구방송국으로 바뀌었고, 6'25전쟁 피란시절에는 육군 군인극장으로 사용하면서 위문공연과 반공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1972년 철거될 때까지 다시 대구방송국으로 이용했다. 그 뒤 1974년 김인호의 설계로 시민회관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칠성바위'로 불리는 지석묘이다. 본래의 위치는 시민회관 서남쪽 일대였다. 1973년 공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지을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칠성동이라는 이름도 이 바위에서 비롯됐다. 칠성바위는 오랜 세월 동안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는 말이 널리 퍼져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조선조 정조 때 경상도 감사로 있던 이태영과 그의 아들 일곱 형제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를 더해 주고 있다. 그뿐이랴. 1907년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열렸던 북후정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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