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을 훌쩍 넘겨보이는 노파가 파라솔 아래서 채소를 팔고 있다. 일흔 가까워 보이는 노파가 채소 앞에 선다.
"(깻잎 뭉치를 가리키며)이거 얼맹교."
"(한 손은 가격이 적혀 있는 종이를 가리켰지만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답한다) 600원."
"500원 하입시다."
"고마 3개 1천원에 가가뿌이소."
"그래 팔마 안 되잖아."
애초 깻잎만 사려했던 노파는 미안함에 깻잎 옆에 놓인 파까지 사간다. 흙이 적잖이 묻은 파도 검은 비닐 봉지에 담겼다. 승자는 누구일까. 파격적인 가격으로 손님의 열린 지갑을 완전 열어젖힌 상인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손님도 싼 가격에 물건을 비닐 봉지에 담아갔으니 윈윈 게임이라 봐도 괜찮다. 구겨지지 않는 '몸빼'바지 허리춤에서 구겨진 지폐가 거스름돈으로 나온다.
◆활기 넘친 불로장
10일 오후 찾은 불로장은 190여개의 파라솔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장이 서지 않으면 승용차가 겨우 한 대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었기에 파라솔을 양쪽에 세우면 양달이 질 틈이 거의 없었다. 일시 소강을 보인 장맛비는 이날 장을 방해하지 않았다. 터지기 직전 두 번의 호루라기 소리로 귀를 막으라는 신호를 주는 뻥튀기 장수까지 자리잡고 있어 전통 5일장 냄새를 물씬 풍겼다. 부추 한 단에 1천원, 소프트볼에 사용되는 공만한 호박이 3개에 1천원. 가격은 착하다 못해 '저게 남는 장사인가' 싶을 정도였다. 250여곳 되는 가판에는 동종을 파는 가게가 대부분. 크게 채소, 어물, 옷이 주류다. 이 때문에 구경삼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약삭빠르다고 여기기엔 이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진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상인들은 솔직한 답변으로 손님들을 대한다.
#장면1
40대로 보이는 주부가 고등어 가판 앞에 섰다. 실랑이는 길지 않다. 솔직한 질문에 솔직한 답이 오간다.
"고등어 얼마 합니까?"
"2마리 3천원요."
"신선한 겁니까?"
"어제 날씨가 안 좋아서 배가 안 떴어요."
"주이소."
"구이용입니까, 조림용입니까?"
#장면2
인근 채소전 앞. 지루한 탐색전 이후 한 젊은 주부가 입을 열었다.
"무시 하나 얼마 합니까?"
"천원"
"(바로 옆에 있는 큰 무를 가리키며)큰 거는 얼마 합니까?"
"그것도 천원"
"그럼 큰 걸 사야지. (잠시 머뭇하더니) 크기가 다른데 왜 값이 같아요?"
"큰 거는 찌개나 국에 쓰고, 도톰한 거는 생채…."
젊은 주부의 질문에 간결하고도 노련한 답이 나온다. 솔직한 답을 주되 판단은 소비자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큰 무는 길이 30cm, 지름 15cm가 족히 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주부는 작은 무를 골랐다.
#5, 10일 장이 서는 불로 5일장. 인근에 대형소매점이 없어 불로동, 지묘동 등 인근 주민들은 이곳으로 장을 보러 왔다. 불로 5일장이 살아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도 곧 들어서게 될 이시아폴리스 내 대형소매점이나 SSM(Super Supermarket)이 들어서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대형소매점의 공습을 피해간다 싶으니 SSM까지 등장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5일장에서도 골목길 상권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파다했다. 하지만 특히 대형소매점을 인근에 둔 곳일수록 더했다. 이미 1차 공습을 맞은 터였기 때문.
◆명맥유지 안심장
그나마 안심장은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성황이었다. 1, 6일 장이 서는 이곳은 영천장, 하양장, 자인장, 신령장으로 이동하는 상인들이 대부분. "1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는 안심장은 실제 우시장과 쌀시장까지 갖춘 경북 3대 장 중 하나였다. 이곳 역시 2004년 신서동에 들어선 대형소매점의 직격탄을 맞았고, 앞으로 들어서게 될 율하 1지구의 대형소매점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심장과 거리는 불과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며 얕은 분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인들은 "전국 최대 크기의 대형소매점이 들어온다는데 근근이 버텨온 것이 와해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주차문제는 공통.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적잖았다.
11일 찾은 안심장은 풍요 속 빈곤이 어느 정도 묻어났다. 모든 상인들이 많이 파는 건 아니었던 것. 상인과 손님 사이의 실랑이에는 5일장 정도 있겠지만 팍팍한 현실이 담겨있었다. 심지어 상인들끼리 나누는 대화에도 실물경기가 묻어있었다.
#장면1
"찰강냉이 5개 3천원"
"중국산 아이가?"
"아이고, 와 이랍니까. 흙 붙은 거 보이잖아요. 중국산이면 여 못 나와요."
"4개에 2천원 안 되나?"
"그라이소. 마"
흙을 대충 툴툴 턴 찰옥수수가 손님에게 넘어가고 1천원짜리 지폐 2장이 상인의 손에 넘어간다. 그걸 지켜보던 또 다른 상인이 말을 건넸다.
"야, 잘 파네."
"오늘 3개 팔았는데 뭘 잘 팔아. 아이고, 영감님요, 아까 그대로 아입니꺼."
"그래도 막걸리 값은 나오겠네."
#장면2
또 다른 채소전. 40cm 길이의 오이가 5개 2천원. 개당 400원인 셈. 상인들 사이에서도 정황 파악에 나선다. 리어카를 끌던 한 상인이 채소 자판 상인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싸게 팝니까?"
"뭐라 캅니까. 4개 2천원에 내놨다가 손님들이 안 사서 한 개 더 얹은건데."
"아이고, 요새 장이 와 이래 '시지부리'하노."
"몰라, 다 휴가갔나?"
◆빈사상태 칠곡장
1, 6일장인 칠곡장의 경우 거의 빈사상태. 골목시장 규모로 폐허가 돼 있었다. 1997년 읍내동에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1차 유탄을 맞았고, 2001년 동천동에 들어선 대형소매점으로 두 번째 유탄을 맞았다. 칠곡 4지구의 수요시장, 칠곡 IC 인근의 금요시장 등 요일시장까지 서면서 칠곡장은 '그로기' 상태. 이 때문에 상인들은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상인들은 "벌써 그 얘기가 나온 게 10년이 넘었다"며 "성패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놔두면 그냥 죽는다"고 입을 모았다.
6일 찾은 칠곡장은 골목 양편에 좌판을 깐 것이나 진배없었다. 월요일이어서 손님이 적다는 말이 상인들 사이에서 오갔지만 토·일요일에 장이 서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이들의 말이었다. 20년 가까이 장에서 좌판을 깔았다는 이종달(59)씨는 "인근의 동명장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지는 않다"며 "대형소매점이 인근에 있는 곳은 손님들이 그쪽으로 다 빨려들어간다"고 했다. 찾는 손님도 찾기 쉽잖았다. 어쩌다 지나는 손님도 대부분 50대 이상. 드문드문 이어지는 손님들의 발길이었지만 끊이지는 않았다. 마치 도심 속 5일장의 생명력처럼.
#장면1
40대로 보이는 주부 한 명이 부산스럽게 움직여 장을 보고 있었다. 미리 살 품목을 정해온 듯했다. 쫓아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물었다.
"장이 생각보다 작은데요. 일부러 오셨나요?"
"싸니까요."
"몇 년째 이용하고 계신가요?"
"여기로 이사오면서부터 쭉이요. 5년 정도 됐네요. 죄송한데 제가 차를 대충 대놓고 왔거든요. 빨리 가야되요. 주차할 곳이 없어서… 얼른 차를 빼야돼요. 죄송해요."
인근에 살면서 장이 서면 식용품은 이곳에서 산다는 말도 곁들인 그의 말처럼 실제로 이곳의 애호박(지름 8cm, 길이 20cm 크기)은 2개에 1천원. 인근 대형소매점의 절반값이었다. 그는 장에 들른 지 5분도 안돼 필요한 물건을 잽싸게 사고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글·사진=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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