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한 마리 없는 마을이 돼지고기로 유명하다?
봉화군내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봉성면 봉성장터. 20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는 이 산골마을엔 돼지고기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소나무 숯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돼지고기의 고소한 맛은 가히 일품. 그런데 이 곳엔 돼지를 치지 않는다. 마을 전체를 뒤져 봐도 돼지우리 자체가 없다. 어떻게 돼지 한 마리 없는 마을에 돼지고기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을까?
"밖에서 기른 돼지가 봉성면으로 들어오지요. 안동, 영주 축산업자들이 돼지를 팔러 옵니다. 그냥 보통 돼지도 이곳에만 오면 고기맛이 좋아져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기 때문이지요. 허허허"
봉화군청 공보계 김순교씨의 설명에도 언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대개 축산업자들은 돼지를 먹여서 대도시에 팔러 가는데 거꾸로 산골 오지마을로 들어간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타지의 많은 사람들도 구운 돼지고기를 맛보러 이 봉성면으로 몰려간다. 매년 이맘때 축제가 열리면 전국 식도락가들이 몰려 장터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전국 최고의 돼지고기 맛
뭐가 어떻게 됐길래 그리 맛있다고 난리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돼지고기 숯불구이 원조격인 봉성면 오시오식육식당을 찾았다. 누렇게 색이 바랜 사업자등록증이 이마에 닿을 듯 걸려 있는 식당 문을 들어서자 당귀 향이 가득하다. 마침 장아찌를 담그기 위해 당귀뿌리를 다듬던 이집 주인 여화자(66) 할머니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손님을 맞는다. 1980년 3월 사업자를 내고 올해까지 29년째 돼지고기를 구워낸 여 할머니의 솜씨를 엿보기 위해 돼지고기 4인분을 시켜놓고 처음부터 구경에 나섰다.
먼저 불구멍이 없는 둥그런 화로에다 숯불을 피우는 것도 재미있다. 휴지조각에다 불을 붙여 소나무 숯에 파묻고 부채질을 한다. 몇 차례 안 되는 부채질에 화로가 벌겋토록 숯불이 피어 오른다. 전담 화부가 온종일 숯에 불을 붙이기 위해 풍로를 돌리며 낑낑대는 소갈비집 숯불과는 너무 다르다. "어쩌면 이렇게 불이 잘붙냐"고 하자, 빙그레 웃으며 '숯이 다르'단다. 참나무 숯이 아니고 부드러운 소나무 숯이라서 불이 잘 붙는다고.
달궈진 화로를 식당 밖 도로변에 내다놓고 돼지고기를 담은 양면석쇠를 얹으니 흰 연기가 피어 오른다. 뒤집기를 여러차례,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기가 타지 않는다. "봐. 여기 봐. 고기가 타지 않지? 참나무 숯이면 불이 강해 꽃불이 일고 벌써 난리났다 난리났어. 고기 탄 그을음이 몸에 그리도 해롭다잖어."
석쇠에 흐르는 기름을 화로 밖으로 털고, 뒤집기를 여러차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가 얼추 익었을 즈음 깨끗하게 다듬은 연한 솔잎을 석쇠 사이에 끼운다. 솔향을 스미게 하는 작업이다. 솔잎이 타지 않고 석쇠 사이로 흐르는 돼지기름에 볶이다시피하는 이 과정이 봉성 돼지숯불구이의 핵이다. "이걸 잘 해야 돼. 그래야 고기맛이 제대로 나지" 고기맛 내는데 자신만만한 할머니는 기분 좋은 듯 웃음소리도 맑다. 신바람나게 털고 뒤집고 부채질하는 양손 놀림이 가히 베테랑 호텔 주방장에 버금간다. 덜 익지도 더 익지도 않았을 때 솔잎을 끼우고 좀 더 구워야 하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 "자! 먹어 봐. 쓰러진다 쓰러져." 군침을 삼키며 다 익기를 기다리다 먹어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른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안에 집어 넣었다. 이건 보통 돼지고기 맛이 아니다. 소나무 숯과 솔잎, 돼지고기가 어우러져 기막힌 돼지고기 구이 진미를 냈다. 기름기가 빠져 돼지고기 특유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그대로 살아있고, 솔향도 입안 가득하다. 씹히는 감도 야들야들하다. 어떻게 이런 맛 기술을 알아냈느냐고 묻자 "동네 옛 할머니들이 석쇠질 하는 걸 봐 뒀다가 따라해 본거지 뭐…"라고 했다. 맛 추임새로 곁들여 낸 당귀뿌리 장아찌의 독특한 향도 구운 돼지고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음식궁합으로 딱이다. 쌉쌀한 갓김치와 새우젓, 머위줄기 무침과 가지, 오이무침, 풍성한 산나물 푸성귀도 숯불 돼지고기 맛을 일품으로 만는다.
'맛 탐방단'으로 참가한 전은영(30·안동시 안흥동)씨는 "치킨처럼 그냥 먹어도 좋고, 밥 반찬으로도 술안주로도 딱 맞아 체인점을 내면 대박이 점쳐진다"고 말했다.
◆봉성 돼지고기 역사와 경제성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 고려 현종(1010년)때부터 구웠단다.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맥적(貊炙), 설야멱(雪夜覓)으로 불리던 우리 민족 전통 고기직화구이 요리가 원조다. 조선시대에 미식(未式) 고기구이 너비아니를 거쳐 차츰 요리기술이 발달해 오늘에 이어졌다고. 처음엔 원래 돼지고기 덩어리를 아궁이 숯불에 묻어 뒀다가 익으면 꺼내서 썰어 그냥 소금에 찍어 먹었다.
1600년대 쓰여진 음식디미방 등 고조리서엔 '설야멱을 가지처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나무 숯 보다 더욱 부드러운 은행나무 숯으로 돼지고기를 구웠다고 해 당시도 돼지고기 솔숯구이는 보편적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봉화지역 향토민속학자 이문학(봉화청소년센터 소장)씨는 "은행나무 숯은 음식을 신비하게 변화시키는 효능이 있는데, 특히 고기맛과 질을 좋게 한다" 며 "화력이 센 참나무 숯은 대장간이나 난방용으로 썼고, 불기운이 은은한 소나무와 은행나무 숯이 조리용으로 널리 사용됐다"고 말했다.
오시오식당 한 곳에서만 구어내는 돼지고기만도 하루에 1, 2마리씩, 한 달이면 40마리를 거뜬히 소비한다. 일년 동안 400~500마리를 잡는다. 상시 문을 열고 있는 전문식당이 7곳. 봉성면 소재지내 식당에서 줄잡아도 한 달이면 300마리를 잡는다. 한 해 동안 구워내는 돼지는 모두 2천여마리. 돼지 한 마리당 평균 40만원이니 연간 생돈(生豚) 8억원어치를 매입하고 있는 셈. 구이용 소나무 숯 구입도 만만찮다. 인근 촌로들이 소죽을 끓이고 남는 숯을 자루에 퍼담아 뒀다가 정기적으로 대준다고. 2만원짜리 소나무 숯 한자루면 돼지 3마리를 구울 수 있다.
◆봉성돼지숯불축제로 명성 이어간다
올해 12회째인 봉성돼지숯불축제는 솔숯 돼지고기 구이를 명성을 더욱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축제는 여 할머니의 남편 강구섭(65)씨의 궁리로 처음 시작됐다. 1회부터 5회째까지 강씨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 곳에는 식당마다 가격이 조금씩 다르다. 1인분 250g당 6천원, 7천원씩. 후식으로 구수한 가마솥숭늉이 나온다. 생고기도 사갈 수 있다.
향토음식산업화 특별취재팀=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프리랜서 강병두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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