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은 의미 있는 해였다.
20세기의 시작, 정신과 물질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때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간됐으며, 레닌이 망명했고, 유럽은 제국주의의 확장 덕분에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때다. 모두 20세기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세기의 첫날, 1900년 1월 1일 태어난 아이가 있다. 이름하여 나인틴 헌드레드(1900). 그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는 버지니아호 1등석 선실의 레몬 상자 안에서 발견됐다. 신대륙을 목전에 두고 버려진 아이. 축복받지 못한 사랑의 결과일까.
기관실에서 일하는 흑인 노동자 데니는 자신이 발견한 아이에게 '데니 부드맨 T.D. 레몬 1900'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이는 배 안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자장가 삼아 커 간다.
'시네마천국' '말레나'의 이탈리아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년)은 이처럼 판타지 같은 드라마로 시작된다.
6세 되던 해 데니마저 석탄실에서 끔찍한 사고로 죽으면서, 아이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파티장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자란 나인틴 헌드레드는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처음 보는 소리 기계다. 건반에 손을 올린 아이는 능숙하게 피아노곡을 친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숯검댕이 꼬마가 때 묻은 손으로 건반을 누를 때마다 아름다운 음악이 파도처럼 찰랑거린다. 마치 모차르트가 환생한 것 같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탄생, 그리고 전설이 시작된다.
이때 나인틴 헌드레드가 친 음악이 'Mozart Reincarnated'라는 곡이다. 말 그대로 '모차르트를 환생시키는' 곡이다. 경쾌하고, 아름다우며 밝고 예쁜 피아노곡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배 위에서 살다 간 이름 없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대형 기선에서 평생을 살면서 육지에서의 진정한 삶의 정착을 거부한 한 남자에 대한 1인극(모놀로그 연극)을 토르나토레 감독이 직접 각색하고 연출했다. 팀 로스가 이 천재 피아니스트 역을 맡았고,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주인공이 연주하는 피아노곡들을 맡았다. 98년 작이지만 국내엔 다소 늦은 2002년 가을에 개봉됐다. 개봉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뒤늦게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배의 출렁거림, 파도의 율동 같은 피아노곡이 전편에 걸쳐 흘러나온다. 이미지와 음악이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폭풍 속에서 피아노와 함께 왈츠를 추듯이 연주하는 장면이다.
거대한 파도 앞에 유람선도 나뭇잎처럼 일렁이다. 선원도 승객도 모두 선실에서 꼼짝하지 않을 때 한껏 기분이 고조된 나인틴 헌드레드(팀 로스)가 무도회장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의 고정쇠를 푸니 피아노가 일렁이는 파도의 리듬에 맞춰 넓은 홀을 무대로 춤을 춘다. 둘은 함께 왈츠를 추는 연인이 된다. 세상을 등지고 피아노만 사랑한 한 남자의 춤.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곡도 '매직 왈츠'다.
한 번도 배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이 남자의 사랑도 갑판에서 이뤄진다. 한 소녀가 배를 탄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떨리는 눈빛에 옅은 분홍빛 입술, 하얀 얼굴, 가냘픈 손길. 선실의 작은 창을 통해 소녀를 보던 그는 아름다운 사랑의 즉흥 피아노곡을 연주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비를 맞으며 레코드판을 들고 있던 그는 결국 그 레코드판을 깨버린다. 세상의 유일한 곡. 그것은 이 남자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은 사랑이다.
흥미롭게 주인공 역을 맡은 팀 로스는 피아노의 문외한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주한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신체 동작을 연구해 연기를 한 것이고, 여기에 실제 연주를 입힌 것이다.
재즈의 창시자인 젤리 롤 모튼(클라렌스 윌리엄 3세)과의 피아노 대결은 마치 무협지를 보는 듯이 판타스틱하게 벌어진다. 나인틴 헌드레드의 소문을 들은 그가 정식으로 피아노 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한 것이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인간으로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묘한 기술을 보여준다.
젤리 역의 클라렌스 윌리엄 3세도 피아노 연주 흉내만 내었다고 하니 영화의 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영화의 원제는 '1900의 전설'(The Legend of 1900)이지만,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란 제목이 훨씬 명료하게 다가온다. 존재했지만, 어디에도 존재한 증빙서류가 없는 한 피아니스트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토르나토레 감독은 이탈리아식 과장(물론 감독의 의도는 이해된다)과 극적인 구조, 애잔한 러브스토리와 아름다운 음악을 버무려, 전설을 만들어냈다.
배 안에서만 살다 짧은 생을 마감한 남자. 그에게 배는 세계이고, 전부였다. 단 한 번 배를 떠날 기회가 있었다. 그 소녀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언덕에서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육지를 밟아 본 적이 없기에 그 우는 소리가 뭔지를 모른다. 바다에서는 바다의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선다. 육지를 밟을 용기가 없었을까. 아니면 내가 안주해 온 보금자리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일까.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기구한 삶이 그를 닮았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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