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
작가: 밀레(1814~1875)
제작연대: 1857-59년
재료: 캔버스 위에 유채
크기: 55.5×66cm
소재지: 오르세미술관(프랑스 파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서구 화가를 꼽는다면 아마도 밀레는 고흐와 함께 수위를 다투는 작가일 것이다. 이 '만종' 역시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연주의로 분류되는 바르비종화파에 속하는 작가 밀레는 농민 화가로 불릴 정도로 농민생활을 즐겨 그렸다. 이를 통해 깊은 신앙심과 노동의 경건함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삭줍기'와 함께 그의 이런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그림으로 평가되는 이 그림에서 밀레는 한 부부가 그날의 노동이 끝난 직후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에 맞추어 하루를 무사히 마친데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평화로운 장면을 묘사했다. 멀리 보이는 교회의 첨탑과 아득한 지평선, 그리고 석양의 황금빛 햇살이 엄숙하고도 경건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그런데 밀레와 그의 작품에 대한 종교적·사회적 관점에서의 이해는, 흔히 신화나 전설이 그러하듯이 사실에서 조금씩 뒤틀어져 있다. 그의 이름 Millet가 더 가까운 발음인 '미예'가 아니라 '밀레'로 번역되었듯이, 이 그림의 명제도 원래는 가톨릭교회에서 하루에 세 번, 즉 아침 정오 저녁에 바치는 기도를 의미하는 '삼종기도'(Angelus)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을 따라 이 중 저녁기도를 뜻하는 만종(晩鐘)으로 번역했다. 특히 신앙심, 노동의 경건함, 사실적 표현 등과 같은 수식어는 종종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예를 들면, 원래 밀레가 그리고자 한 주제는 굶어 죽은 자식을 매장하는 부모였으나 놀란 동료의 충고로 아이의 시체는 감자 자루로 바뀌고, 슬픔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대체되었다. 물론 이 변화에 종교적 이유가 작용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로 할머니의 장례식 등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삶이 빈곤하여 경제적 수준이 주변 농민과 마찬가지거나, 더 열악했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농민들과 교류나 동류의식 따위를 가지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밀레에게 있어서 농민의 삶과 그들의 기도는 다른 풍경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소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밀레는 그들의 삶을 미화하지도 비하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사실 그가 진정 교감을 느낀 대상은 열심히 일하는 농민도, 뾰족한 종탑도 아닌, 대지로 대표되는 자연 그 자체이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대지는 항상 광활한 지평선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적 창조주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자연으로서의 대지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제작태도는 낭만주의로 크게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날카로운 현실비판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던 쿠르베의 사실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권기준(대구사이버대 미술치료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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