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907년 대구읍성 파괴, 동성로 등 4성로 만들어

읍성의 시대 가고, 도로의 시대 열린 대구의 신작로

일제 시대 서문로 전경
일제 시대 서문로 전경

길을 중심으로 볼 때 대구는 1907년 대구읍성이 파괴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읍성의 시대가 가고 도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읍성이 있을 때만 해도 대구는 골목과 소로(小路)의 도시였지만 읍성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 놓인 신작로(新作路)는 도시의 모습을 바꾸었다. 폭 2~5m의 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던 도시에 폭 9m의 큰길은 충격이었으리라. 이 길이 이른바 4성로(동·서·남·북성로)다.

뒤이어 1909년에는 이보다 더 넓은 폭 10m 길이 닦인다.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와 북성로를 도심 내부로 연결하며 교차하는 십자대로다. 경상감영을 놓고 동서남북으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4성로와 십자대로는 대구 최초의 신작로로 일본인들의 대구 수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조선인들이 대부분 소유하던 읍성 내 땅값은 일본인 소유가 많던 성 밖 땅값에 비해 3, 4배 비쌌는데 성곽 파괴와 신작로 조성으로 읍성 밖 땅값이 폭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대로를 따라 일본의 통치기구가 들어섰고 주변으로 일본인 최대의 상권이 형성됐다.

현재 대구 도심을 동서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중앙로와 국채보상로(동서신로)는 그 뒤에 만들어진 길이다. 중앙로는 1917년 북성로에서부터 반월당으로 이어지는 폭 15m의 대로로 조성됐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극장, 여관, 양복점, 잡화점 등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새로운 상권이 만들어졌다. 1971년 대구역 지하도로가 건설되면서 대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심로가 됐다.

국채보상로는 1937년 일제의 시가지 계획령에 따라 중앙로와 교차하는 새 길로 계획됐으나, 동대구역~동신교~한일극장~동산파출소를 연결하는 동서관통도로로 완공된 것은 1959년이 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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