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로저 컴블-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자신만만하게 살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히 예민한 감정의 선은 찰흙처럼 재주를 부릴 수가 없다. 품었다가 뱉고, 다시 담아내 풀어낼 수가 없으니 늘 하심(下心)할 수밖에.

사랑은 어떨까.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어느 날 마음 한쪽에서 보푸라기 일 듯 서서히 시작되기도 하고, 도둑처럼 갑자기 들이닥쳐 마음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고는 호령하기도 한다.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말은 절대 사랑에 빠지겠다는 선언과 같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쓴 '위험한 관계'의 발몽 자작이 그렇다.

사랑이란 것은 게임이며, 언제든 자신의 말(馬)을 수완 좋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하의 바람둥이다. 그 또한 사랑의 제물이 되니, 사랑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관계'는 여러 편의 영화로 리메이크됐다. 1989년에는 밀로스 포만 감독이 제프리 존스와 아네트 베닝을 기용해 '발몽'을 만들었으며, 1988년에는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글렌 클로즈와 존 말코비치, 미셀 파이퍼를 주인공으로 '위험한 관계'를 연출했다. 또 로저 컴블은 1999년 라이언 필립, 사라 미셀 겔러,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으로 리메이크했다.

원작은 파리 사교계 남녀가 보낸 175통의 편지를 엮어서 만든 서간 소설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문란하고 퇴폐적인 프랑스 상류 사회의 모습을 농도 짙은 성애 묘사와 다양한 문체, 풍부한 감정 등으로 잘 엮어냈다.

10년 터울로 나온 이들 영화들은 과거, 그리고 현대, 미래 사회에서도 여전히 고민이 될 인류의 영원한 숙제, 사랑을 다양한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고전은 물론,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더라도 사랑의 정형은 여전하다. 유혹과 상처, 복수의 3중주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의 원제는 'Cruel Intentions'이다. '잔인한 의도들'이라고 해석될 영제보다 한글 제목이 훨씬 정감 넘친다.

맨해튼 최고의 상류층 자제들인 캐서린(사라 미셀 갤러)과 세바스찬(라이언 필립)은 의붓남매 사이다. 태어나면서 물질적 풍요 속에 자란 이들의 양심, 윤리지수는 아주 낮은 편이지만, 관능지수는 아주 높다. 사랑을 농락하고, 세상을 희롱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이다. 진실한 사랑은 구차스런 감정의 주범일 뿐, 눈앞의 말초성에 집중한다.

캐서린이 세바스찬에 제안하는 것도 속물적이다. 남자 친구가 자신을 버리고 순진한 여자에게 갔으니 그 여자를 짓밟으라는 것이다. 질투의 화신이라기보다 치졸한 복수에 가깝다. 이런 일은 쉬운 일이다. 사교계의 양대 산맥인 이들은 극적 재미와 스릴을 위해 고단위 게임에 돌입한다.

타깃이 된 것이 새 학장의 딸 아네트(리즈 위더스푼). 학교 잡지에 '혼전 순결'을 서약하는 글을 기고한 정숙한 여학생이다. 세바스찬은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네트를 유혹해 순결을 파괴하고, 잠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캐서린에게 내기를 건다. 만일 세바스찬이 실패하면 자신의 차 1956년형 재규어를 캐서린에게 주고, 성공하면 세바스찬이 늘 요구했던 대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조건이다.

아네트의 마음을 빼앗기 위한 갖가지 공략에도 그녀는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네트는 세바스찬에게 차츰 마음을 열어가고, 세바스찬도 그동안 잊고 있던 웃음을 되찾는다. 드디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바스찬은 최후의 승리를 반납해 버린다. 침대로 이끄는 아네트의 손길을 뒤로한 채 방을 나와 버린 것이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군인이었던 작가 라클로가 군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위험한 관계'는 1782년 발표되자 한 달 사이에 2천부 이상이 판매됐다. 당시 출판 규모로는 경이로운 판매부수이다. 짙은 성애 묘사로 한때 '악덕한 책'으로 치부돼 문학사에서 잊혔다가 스탕달, 보들레르 등이 발굴해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이성과 도덕이 지배하던 계몽주의 시대, 그 속에 적나라하고 음습하게 잠복해 있던 프랑스 사교계의 허영과 성적 욕망이 잘 드러나 있어 18세기 성담론의 중요한 자료로 읽히기도 한다.

원작은 점찍은 여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복하는 희대의 바람둥이 발몽 자작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도 사랑임을 깨닫지 못해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진정한 사랑의 그녀는 자신이 농락된 사실을 알고 자살하고, 발몽도 결투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게 된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서는 아네트가 세바스찬의 일기장을 공개해 캐서린의 파렴치한 행각을 세상에 알리고, 그에게 준 마음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청산한다.

원작의 위험한 관계를 가장 드라마틱하면서 감성적으로 리메이크한 것이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남녀상열지사'(2003년)이다. 이 감독은 고루하고, 꽉 막힌 조선 상류 사회에 대해 반감을 가진 한 선비 조원(배용준)과 시대를 거스르는 욕망의 여인 조씨 부인(이미숙), 둘의 정복게임에 희생된 숙부인(전도연)의 삼각관계로 변주했다.

특히 조원이 죽고 남긴 책 때문에 조씨 부인의 조신하지 못한 처신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녀는 가문의 수치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탈출해 멀리 떠난다. 화려했던 과거는 사라지고, 초라한 행색의 그녀가 한때 조원이 가져다 준 꽃을 보며 그를 회상하는 장면은 상당히 동양적인 정서를 보여준다. 삶의 덧없음과 함께 고이 간직한, 그러나 표현할 수 없어 이뤄지지 못한 정념의 불꽃과 회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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