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릴 때 야구에는 지명대타 제도(Designated Hitter)가 없었다. 귀에 붙여 들었던 고교야구 라디오 중계방송에는 4번 타자가 대부분 투수여서 의례히 투수는 팀의 중추로 잘치고 잘 던지는 선수로 여겨졌다. 그러다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 지명타자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고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져서 투수는 당연히 쳐서는 안될 존재로까지 인식하게 돼버리고 말았다.
9명이 주축이 되었던 야구는 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10명으로 늘어났던 것일까? 지구상 최초의 야구리그로 전통을 중요시하는 내셔널리그가 아직까지 9인제 야구 명맥을 유지하는 반면 후발 주자였던 아메리칸리그는 1963년에 이르러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터무니없이 스트라이크존을 넓혀버린 것이었다. 후유증은 서서히 투고타저의 현실로 나타났고 1968년에 이르러서는 리그 전체 타율이 2할4푼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덕분에 1대0이나 2대0, 2대1 등의 스코어들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관중들은 맛없는 음식을 대하듯 지루한 경기 내용에 대해 푸념을 늘어 놓았다. 위기를 느낀 아메리칸리그 사무국은 부랴부랴 마운드의 높이를 낮추고 스트라이크존을 좁혀봤지만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에겐 좀더 자극적인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갖가지 방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뚜렷한 무엇이 없던 차에 투수 대신에 다른 선수가 배팅을 하자는 방안이 제시됐다. 당시 투수들의 타율은 평균 1할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이 방안은 노쇠 현상을 보이던 미키 맨틀이나 윌리 메이즈같은 유명한 선수들의 장타력을 활용하고 은퇴를 늦추어 관중 동원에도 유익하다는 차원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즉각 실천에 옮겨져 마이너리그에서 실험을 거쳤지만 그 동안의 야구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2년에 이르러 아메리칸리그의 투고타저 현상이 최고조에 이르고 내셔널리그에 비해 관중이 200만명이나 감소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다시 1973년부터 지명대타라는 이름으로 야구판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1회용 대타가 아니라 경기 끝까지 출장이 가능한 대타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야구에 파급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도입 후의 20년 동안 기록을 통한 검증으로 D.H 제도는 야구 판도에 그다지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야구의 가이드라 불리는 레너드 코페드 조차도 지명대타 제도는 "뭔가 새롭다는 것, 또는 뭔가 새롭게 꾸미려고 노력한다는 것" 정도로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투수들이 타격하던 시대에 적어도 2~3이닝은 득점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던 반면 이제는 모든 이닝에서 득점이 가능해졌다는 점과 수비로의 전환도 가능해 전술 변화가 더해졌으며 분업으로 인해 투수 운용의 폭을 넓히는 계기도 되어 야구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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