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남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나아야 하는데…."
막바지 장맛비가 흩뿌린 28일 오후, 대구시 중구 동인동의 낡고 좁은 1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만난 임희주(42·여)씨는 손님이 찾아와도 꼼짝도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이날 오전 혈액투석을 받고 왔기 때문이다. 혈액투석을 한 날은 어지럼증으로 일어설 수조차 없다고 했다.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으로 신장 기능에 손상이 오면서 앞으로 계속 투석을 받아야만 하는 신세다.
임씨는 평소에도 앉아있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임씨에게는 오직 서 있는 것과 누워있는 것 만이 허락돼 있다. '크론병'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함께 앓고 있기 때문이다. 크론병은 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관 전체에 걸쳐 어느 부위에서든지 발생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 임씨의 경우에는 엉덩이 부위가 염증이 심해 늘 누워있거나 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임씨가 처음 '크론병' 진단을 받은 것은 2000년. 1993년 남편 권재봉(49)씨와 결혼한 뒤 몇 차례의 유산으로 아기에 대한 갈망이 눈덩이처럼 커졌을 무렵이었다. 임씨는 "크론병 진단을 받으면서 아이 갖기는 포기하고 말았다"며 "혹시라도 병이 아이에게 유전될까 겁이 났다"고 했다.
지난해 5월에는 '다발성 골수종' 진단까지 더해졌다. 한동안 다리가 붓고, 어지럽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증상이 계속돼 뭔가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짐작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일을 나가기 전에 엉덩이 상처 소독을 해 준 남편이 잠시 담배를 피우려 나간 사이 '쿵'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혈액암까지 생기면서 남편은 아예 일을 그만둬야 했다. 매일 상처 소독을 해주고 하루 걸러 한 번씩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고, 일년에 절반을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임씨를 간호하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공사장 인부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마련했던 승합차는 임씨의 '침대차'로 용도가 바뀌었다. 뒷자리에 이불을 두껍게 깔아 이동식 침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것. 한 달에 평균 두 번은 서울 병원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앉질 못하는 임씨는 기차를 탈 수도, 버스를 탈 수도 없어 남편이 고안해 낸 궁여지책이었다.
임씨가 병원 신세를 진지도 벌써 10년째. 한 번 입원할 때마다 수백만원씩의 병원비와 대구-서울을 오가는 경비만으로도 수천만원이 지출됐다. 임씨를 돌보느라 지난해부터 남편의 수입이 뚝 끊기면서 이들은 차상위계층으로 정부의 의료보호를 받고 있다. 혈액암 진단을 받으면서 미리 가입해 둔 보험사에서 2천만원의 진단비를 받았지만 지난해 6개월 이상 입원을 하면서 이제는 남은 돈도 바닥났다.
임씨가 몸져 눕자 남편은 이제 살림꾼이 다 됐다. 처음 혈액암이 발병했을 때는 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많았지만 이제는 임씨에게 무슨 양념을 넣어야 하는지 묻지도 않고 뚝딱뚝딱 밥상을 잘만 차려낸다. 옆 방에 가지런히 널린 빨래 역시 남편의 솜씨라고 했다.
크론병으로 인해 방사선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임씨는 현재 약물 치료만으로 수치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임씨는 "컨디션이 조금만 회복돼 준다면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해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데 1년이 지나도록 수치가 나아지질 않아 걱정"이라며 한숨만 내쉬었다.
2시간 남짓의 취재가 계속되는 동안 남편 권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쑥쓰러움이 많은 남편은 취재진의 방문을 피해 자리를 피한 후였다. 임씨는 연신 전화를 걸어 남편을 찾았다. 남편과의 통화가 되질 않자 "이런 웬수"라며 푸념섞인 한숨을 뱉어냈지만, 남편의 이야기를 하는 임씨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임씨는 "성격이 급해 불쑥 화를 잘 내지만 속마음은 정말 여린 사람"이라며 "빨리 나아 남편에게 더 이상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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