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토크]슬픔은 두고두고…

의사들 간 은어처럼 나도는 독특한 사자성어가 하나 있다. '유비무환'으로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환자가 없다는 얘기다. 차들이 분주히 와이퍼를 돌리며 바쁘게 질주하는 교차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소나무는 제자리가 아닌 듯 안타깝게 비에 젖어 처량하다. 비 내리는 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어색한 소나무를 벗 삼아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앞에 두고 소설을 읽으며 '게으름의 찬양'을 하고 싶은 오후였다.

망중한도 잠시, 간호사가 벌컥 진료실 문을 열고 환자를 모시고 온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아 아쉬워하고 있는데 조그만 목소리가 애절하게 들린다. 환자분이 "간호사 좀…"이라며 고갯짓을 한다.

상황 판단이 빠른 간호사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사라지자 50대 후반의 중년 여인은 다소 머뭇거리며 상의를 벗는다. 조악한 하트 모양의 문신이 등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그녀가 '패션쇼' 하는 모델처럼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하는데 양쪽 상박에는 선과 점이 어지럽게 기하학적으로 새겨져 있다. 망설임 없이 하의를 벗자 양 허벅지의 내'외측에도 빈틈없이 글자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음부 위에 새겨진 이름 석자 앞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뜻 보기에도 입성과 행색이 초라한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사연은 분노에 가까운 슬픔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이자 의처증인 남편은 수시로 때리고, 달군 연탄집게로 닥치는 대로 지지고…" 라면서 가리키는 얼굴에는 화상 흉터가 선명하다. 마음의 흉터는 보이는 자국보다 더욱 선연하리라!

20년 전 오늘처럼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남편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고주망태가 돼 집으로 돌아와 머리채를 잡고 배자못으로 끌고가서 실컷 두들겨 팬 뒤 정신이 없는 자신에게 온몸을 도화지 삼아 낙서(?)를 했다고 한다. 남편은 빗속에 자신을 버려둔 채 사라지고 아픔보다 수치와 절망감에 달음질쳐 못으로 뛰어들었지만 죽지 못하고 산 세월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녀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목욕탕도 갈 수 없었고, 반팔 상의도 입을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감내하기 어려운 점은 병원 진찰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하혈을 해도 산부인과에 갈 수 없고, 다리 인대가 늘어나 정형외과에서 깁스를 하려 해도 옷을 벗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천벌과도 같은 문신을 없애려고 이리저리 수소문해 진찰했더니 레이저 시술 비용이 자신의 단칸방 보증금에 달해 단념한 것이 십년 전이란다. 그러다가 최근에 보험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다시 병원을 찾았다고.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안타깝게도 보험 급여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뭐라 말할 것인가?

"보험 급여는 안되는데…."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지예…." 일어서는 그녀에게 "일단 시술부터 합시다." "치료비는 어쩌고예?" "형편대로 주세요." 그때부터 그녀는 울기 시작한다. 마취약을 바르고 기다리는 동안, 시술하는 동안, 끊임없이 흐느낀다.

그녀의 사연을 생생히 듣고 나면 누구라도 그녀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그녀의 슬픔이 두고 두고 우리네 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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