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원상회복하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 "언론의 자유와 독립".
1970, 80년대 구호가 아니다.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 시대도 아닌 21세기 오늘 각계에서 부르짖는 외침이다. 요즘 시국선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시국선언의 주요 화두는 '민주주의 원상회복'이다.
시국선언 발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지금까지 정치·사회적으로 중대한 이슈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시국선언이 이뤄졌다. 3·15 부정선거 등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한 저항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이 같은 국민적 저항을 담은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 발표는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주효한 역할을 했다.
시국선언은 그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국선언문은 국내외 정세, 특히 정치·경제·사회·외교적으로 중대한 혼란이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특정 집단 또는 각 계층에서 혼란과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시 '민주주의'인가. 70, 80년대 공안통치 시절 시국선언의 주요 화두는 '민주주의 쟁취'였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사회민주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게 국민적 평가다. 그런데 30년, 40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방증일까. 최근 시국선언을 주도하는 집단이 외치고 있는 '민주주의 원상회복'이란 화두가 타당하다면 현 정권 들어 민주주의가 과거보다 후퇴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있다. 시국선언을 통해 당시 주요 화두와 사건 등 시국 상황을 짚어본다.
시국선언의 주요 화두로는 박정희 정권시절 '민주와 인권 확립, 독재정권 퇴진', 전두환 정권시절 '독재타도, 민주쟁취', 노태우 정권시절 '5공 청산, 민주쟁취' 등이다. 또 김영삼 정권시절 '과거청산, 악법철폐', 김대중 정권시절 '부정부패 청산, 개혁입법 쟁취, 미군 장갑차 만행 규탄', 노무현 정권시절 '탄핵반대, 한미FTA협상 중단', 이명박 현 정권 '민주주의 원상회복' 등을 꼽을 수 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당시 독재, 민주, 인권 등 '탄압에 대한 저항'이 주요 화두였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과거와 부패, 악법을 청산하고 새로운 법을 도입하자는 '청산과 새 출발'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런데 현 정권에서는 '공안탄압 중단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70, 80년대 화두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민주주의 원상회복, 이명박 정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현 정부의 정책과 정권 자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용산 참사 등도 정권에 대한 불신을 불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선언 발표는 지난해 5월부터 전국 30개 대학 총학생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한불교조계종, 전교조를 비롯해 각계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기점으로 '배제와 봉쇄의 무단정치' '갈등과 반목의 여론몰이' '국민 무시'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 통제'란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지난 6월 서울대 교수 120여명이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대구경북지역 교수 303명, 서울지역 대학교수 500여명, 변호사 600여명, 문학인 20여명, 전교조 2만8천여명 등이 잇따라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전국 각 대학 교수, 종교계 등은 30, 40년 전 구호로 나왔던 '인권, 민주주의 회복' 등을 재차 요구하고 있다. 촛불 정국으로 촉발된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요구는 최근 정부 여당의 미디어 관련법 통과로 또다시 국민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미FTA 논란과 탄핵 반대, 참여정부
참여정부 초기에는 '대통령 탄핵'이, 집권 중후반기에는 '한미FTA'가 시국선언의 주요 계기가 됐다.
탄핵 반대 시국선언은 2004년 3월 경북지역 교사 201명,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직원 43명, 전교조 1만7천여명, 대구경북지역 교수 430명을 포함한 전국 대학교수 수천명, 법조인 150여명 등 일파만파로 퍼졌다.
'한미FTA 협상 중단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시국선언도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참여연대,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진보단체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반면 대북정책, 전시작전권, 국가보안법 등을 둘러싼 보수단체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대구경북지역 보수단체 회원 1천여명은 2005년 11월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국가 정체성 지키기'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시국선언을, 전직 경찰총수 26명과 보수인사 500여명은 2006년 9월과 11월 각각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반대, 국가정체성 수호, 대북정책 수정'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부패 청산 요구 빗발, 국민의 정부
IMF 외환위기를 넘긴 김대중 정권시절에는 정경유착을 비롯해 부정부패 척결, 개혁입법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2002년 말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반미 목소리가 드높았다.
98년 11월 각계 원로 103명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척결'을 요구하는 시국선언, 99년 5월 전국 41개 대학 교수 536명의 '기업의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및 부실기업 총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발표됐다. 또 99년 6월 부산지역 45개 시민단체의 '조폐공사 및 부산지하철 파업 공작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시국선언, 같은 달 각계 대표 100인의 '옷 로비와 조폐공사 파업 유도 등 권력형 비리 근절'을 위한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2001년 초에는 '부패방지법 및 인권위원회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잇따랐고, 2002년 5월에는 대통령 아들과 측근 비리를 규탄하고 '정치 개혁, 부패 청산' 요구 시국선언이 각계에서 일어났다.
◆과거청산과 악법철폐 요구 봇물,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 초기에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및 12·12쿠데타 가담자 처벌이 시국선언의 주 내용이었다. 94년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시국선언문 발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80년 광주와 12·12에 대한 책임, 5·6공 인사에 대한 심판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96년 3월엔 대구경북 기독교계 인사 531명이 '5·6공 인사 심판을 통한 과거 청산'을 내용으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정권 말기에는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여당 단독처리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97년 1월 대구경북지역 교사 197명을 비롯해 전국 교사 2천800여명이 '안기부법과 노동법의 전면 재개정'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학술단체협의회 1천500여명, 문인 849명, 종교계 등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민주화의 분수령, 80년대
80년 광주, 87년 호헌은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주요 모티브가 됐다.
80년 5월에는 전국 대학생들의 시국성토대회,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군부의 집권을 막고,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85년에는 문학인 401명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할 정도로 언로가 통제된 시국상황이었다. 87년 전두환 정권 말기, 권력 연장을 위한 호헌 발표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불을 댕겼다.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시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헌법 쟁취, 민주정부 수립' 시국성명 등 각계의 시국선언과 시위가 6월 항쟁으로 점화됐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졌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민주화 요구 물결은 노태우 정권시절인 88년 11월 기독교계의 '5공 비리 청산' 시국선언, 91년 5월 종교계와 학계의 '공안통치 종식, 민주화 실현' 시국선언 등으로 계속됐다. 80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전두환·노태우 정권시절 시국선언은 대학생, 교수, 종교계, 재야단체 등이 주도했고, 특히 87년 6월 항쟁은 넥타이 부대를 비롯해 계층을 망라한 국민들이 참여했다. 한국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입'이 묶였던 유신
박정희 정권 특히 서슬 퍼렇던 유신시절엔 일부 재야 또는 종교계를 제외하곤 시국선언 발표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당한 탄압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73년 8월 당시 일본 도쿄에서의 김대중씨 피랍사건 이후 반독재, 반유신체제 운동이 일어나고 지식인과 종교계의 시국선언문이 채택되자, 이듬해 4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됐다. 학생들의 수업거부 등 일체의 집단행동이 금지됐는데,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1천24명을 조사, 180명을 군법에 회부해 구속시켰다. 김대중씨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76년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3·1 시국선언을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 공개적인 시국선언은 흔치 않았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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