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영(57) 코레일 사장 취임 이후 KTX를 이용하는 대구 시민들의 생활에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생겼다. 서울행 KTX 막차 출발 시각이 오후 10시 36분에서 11시 13분으로 40여분 늦춰진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많은 승객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바이어들과 느긋하게 저녁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허 사장은 "막상 와서 일해보니까 열차 시각을 연장하는 일도 국민 생활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취임하면서 내세운 '국민 철도'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딱 들어맞는 조치였다. 그는 "고객을 만족시키면 수익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다"며 "KTX 막차 연장으로 하루 평균 520명 정도의 고객이 늘었고, 연간 수익도 35억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민철도 캐치프레이저에 '딱'
코레일 사장 집무실에서 만난 그의 표정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경찰 수장일 때 굳어졌던 딱딱한 인상이 '시골 아저씨'의 그것처럼 수더분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외무고시 출신인 그가 경찰이 된 이력에 빗대 외교관답지 않은 외모 때문에 경찰로 직업을 바꾼 것 아니냐고 농담삼아 물었다. 그는 "경찰에서는 외교관 인상이라고 하던데… "라며 "외교 이론은 가장 비타협적이면서도 부드럽게 포장하는 능력을 강조하는데, 그런 점에서 가장 비타협적인 사람이 외교관이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치안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서울경찰청장을 거쳐 경찰청장이 될 때까지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그러나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경찰의 수사권 독립까지 추진하고 나선 그는 결국 1년 만에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내 목표는 경찰청장이었으며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미련이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 아니냐"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코레일 사장으로 보낸 지난 4개월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코레일 사장은 CEO지만 경찰청장의 역할과 흡사하다"며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직원 수 3만2천여명에 협력 업체 직원을 더하면 32만여명으로 15만 경찰처럼 거대 조직인데다 주말과 명절 등 일반인들이 쉴 때 더 바쁘게 일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중요시하는 점도 경찰과 똑같다는 것이다. 경찰수장으로서 익힌 리더십이 여기서도 통한다는 얘기다.
겸손'격려'경청 '3겨 리더십'
그러나 그는 강한 리더십이 아니라 겸손과 격려, 경청이라는 '3겨 리더십'으로 거대한 코레일을 이끈다. 수시로 직원들과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등 내부 소통에 힘쓰고 있다. 그는 "기술직과 전문가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CEO로서의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철도가 녹색성장 시대의 교통 수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시점에 코레일 사장에 취임하게 된 것도 운이 좋다고 했다. 허 사장은 "철도는 안전하고 정확하고 환경 친화적인 교통 수단"이라며 "그래서 축구 선수 안정환씨를 홍보대사로 위촉했다"고 소개하고는 KTX의 서울-부산 간 운행 비용은 108만원(935명 탑승)에 불과한데 승용차로 똑같은 인원을 수송할 경우 1천342만원(통행요금 제외)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철도가 미래 성장 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적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며 현재 여객과 물류 분야의 수송 분담률이 각각 7.8%~6.2%에 불과한데 3년 안에 20~15% 수준으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KTX 개통 이후 대구가 최대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대구 지역 여론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KTX 이용객의 17%가 대구권 승객인데다 동대구역에 정차하는 여객열차(302회)가 서울역(277회)보다 더 많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동대구역 KTX 승하차 승객 수도 서울역의 60%를 상회한다는 수치도 내놓았다. 그랬더니 그는 내년 말 고속철도 2단계 구간인 동대구-부산 간 개통에 맞춰 동대구역을 증축, 주차 공간을 확충하고 고속버스와 지하철, 상가를 통합하는 통합환승센터 건설을 대구시와 협의하고 있다는 대책을 소개했다.
허 사장은 서울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지역 경제가 수도권에 흡수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대구를 찾을 수 있도록 관광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수도권의 사람과 물류 유입이 많아질 것"이라며 '역발상'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구 지역을 대상으로 한 철도 상품 개발도 서두르겠다고 약속했다.
"대구 대상 철도상품 개발하겠다"
동해남부선 복선화 등 지역 숙원 사업에 대해서도 그는 "전국을 2시간 대 생활권으로 재편하고 장차 남북통일 시대뿐만 아니라 대륙철도와의 연결을 염두에 두고 반드시 진행해야 할 사업"이라며 "국토해양부 등과 긴밀하게 협조, 가급적 빨리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치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지만 그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 지난 대선 때는 한나라당 선대위 행정자치위원장으로 일조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경찰청장 직을 물러난 뒤 당시 여권으로부터 집요하게 경북도지사와 재보선 출마 러브콜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와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공직자로서는 정부에 충성했지만 공직을 떠나서는 소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대구 토박이인 그는 삼덕초, 경북중'고를 거쳐 고려대를 졸업했고, 외무고시로 공직에 입문해 영양에서 첫 경찰서장을 지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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