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엥게란드 잔 클로드'라는 騎士(기사)는 7년 동안이나 무거운 투구와 쇠 갑옷을 입은 채로 식사를 하고 잠을 자며 지냈다. 그가 타던 말도 '전투' 軍裝(군장)을 덮어쓴 채로 7년 밤낮을 주인과 함께 고통을 견뎌야 했다. 이유는 클로드가 할아버지를 처형한 국왕의 판결이 부당했다며 조부님의 억울함이 풀어질 때까지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332년 국왕 필립 5세가 클로드 조부의 무죄를 뒤늦게 인정, 면죄해 주고 나서야 갑옷과 투구를 벗었는데 이미 7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였다. 투구와 갑옷을 벗지 않겠다는 맹세를 7년간이나 지킴으로써 결의를 관철한 것이다. 선언과 맹세를 어떻게 지켜야 감동을 주는 진정한 맹세가 되는가를 깨우쳐주는 일화다.
흔히 정치판에도 권력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때 이에 맞서 '안 고쳐지면 이렇게 하겠다'는 결의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斷食(단식)이나 辭表(사표)를 쓴다. 단식이란 상대가 결정이나 태도를 바꿔 주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는 뜻이니 곧 '생명'을 거는 것이다. 사표 또한 먹고사는 밥줄(직업)이나 사회적 기득권과 명예의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니 정치인으로 치면 이 역시 생명(정치)을 거는 것이 된다.
어느 쪽이든 목숨을 건 맹세가 되는 셈이다. 그만큼 가볍게 벌일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판엔 단식과 사표 쓰기가 너무나 가볍게 관행이다시피 유행돼 왔다. 여'야 간에 싸움거리만 터지면 으레 한두 명 또는 집단적으로 그런 단식꾼이나 사표 쓰기가 등장했다. 그들이 모두 클로드 騎士처럼 언행일치의 지조와 초지일관 변하지 않는 丹心(단심)과 목숨을 草芥(초개)처럼 여길 만큼 나라와 바른 정치를 열망해서일까? 아무리 돌아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지난날 수많은 정치인들의 단식과 사표 쓰기가 의롭고, 목숨을 건 진정성 있는 단식과 사표 쓰기였다면 60년 가까운 헌정 사상 적어도 몇 명쯤은 단식 끝에 목숨이 끊겨 국회葬(장)을 했거나 사표 쓰기로 의사당을 떠난 참 '영웅'이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없었다'. 26년 전 23일을 단식한 YS도 살아있고 19년 전 13일 단식한 DJ도 생존해 있다. 24일 넘는 단식으로 YS의 기록을 깬 강기갑 의원도 공중부양할 만큼 건재하다.
작년 촛불 시위 때 무기한 단식기도하겠다며 길거리에 나섰던 무슨 사제단 사람들도 아직 다 쌩쌩하게 살아있다. 정치마당에서 정치 단식하다 죽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불행한 일이 있었어야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용과 진정성의 이야기다.
자유로운 의사표시가 억압되던 시절에는 단식이라는 극단적 방식이 불가피한 투쟁수단으로 비쳐지고 그런대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지만 요즘엔 솔직히 약발이 안 듣는다. 진정성이 보여지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미디어 법 시비로 사퇴서를 내놓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의 사표 투쟁도 그런 無(무)약발의 불신만 키우고 있다. 반세기 넘는 議政史上(의정사상) 투쟁용으로 사표 써서 수리된 선배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빤히 계산하고 낸 사표 아니냐는 불신 같은 것이다. 80여 명이 몽땅 국회서 방 빼고 국회의장이 수리하든 말든 끝까지 집으로 갔다면 그런 불신도 없다. 그러나 뻔히 수리 안 되고 의원직 그대로 보존될 걸 알고 낸 사표라면 辭表가 아니라 '혀는 맹세했지만 가슴은 맹세하지 않은' 국민을 속인 邪表(사표) 쪽지가 된다.
'거짓말쟁이는 일단 맹세부터 하고 본다'는 말이 있다. 집단 사퇴서 낸 민주당 의원들이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는 그들이 당장 배지부터 떼고 클로드처럼 7년이고 10년이고 소신대로 싸우느냐 아니면 한두 달 눈치만 살피다가 사표 반려를 핑계로 다시 꾸역꾸역 국회로 들어오느냐에 달려 있다. 애당초 죽을 각오 없는 단식, 나갈 구멍 알고 내는 사표… 그런 부끄러운 정치 관행, 이제는 버려라.
불신과 위선을 키우고 조장하는 관행이 당연한 듯 되풀이되면 나라의 道義(도의)와 국민들의 양심까지, 야위어지는 숫돌처럼 어느새 함께 사그라진다.
金 廷 吉(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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