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書架(서가)를 정리하면서, 손때 묻은 책 한 권과 너무도 오래간만에 遭遇(조우)한 기쁨에 빠진 적이 있다. 필자가 법과대학에 재학 중일 때, 사법시험 준비를 하면서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던 '헌법사례 연구집'이었다.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빨강, 파랑, 흑색의 볼펜 밑줄로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는 그 책의 어느 한쪽 여백에는 "담배 한 대 피우고 하자. 커피는 네가 사라"는 친구의 장난스런 메모도, "오늘 쉬어 가면, 내일은 뛰어가야 한다"는 필자의 각오가 적힌 메모도 이제는 서로 수줍은 듯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책 사이에 뭔가가 두툼한 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어, '뭐지?' 하는 생각에 바로 그 부분을 펼쳐보았다. '의회주의'라고 적혀 있는 章(장)의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반으로 접혀 있는 A4용지 한 장과 4분의 1 크기로 접혀져 있는 B4용지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기했다.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앞두고 연습해 본 모의고사 문제와 당시 필자가 직접 작성해 본 手記(수기)의 답안지였는데 A4용지에 적혀 있는 사례(case) 형식의 문제는 이러했다.
"1996. 12. 23.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소집 요구에 따라 임시회가 소집되었으나, 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저지로 본회의가 개의되지 못하였고, 같은 사유로 그 다음날에도 본회의가 개의되지 못하게 되자, 국회의장을 대리한 국회부의장은 두 야당의 원내대표와 아무런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회의 개의시각을 변경하고, 야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는 회의의 일시를 적법하게 통지하지 아니한 채, 1996. 12. 26. 06:00경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만이 출석한 가운데 본회의를 개의하여 법률안을 상정한 후, 질의'토론 없이 異議(이의)의 유무를 묻는 방법으로 표결하여 약 6분 만에 법률안이 출석 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이와 관련된 헌법적 문제점에 대해 논하라."
1996년 12월 26일에 있었던 소위 노동관계법안 날치기통과 사건의 실제 사례를 예상문제로 뽑아서 모의고사를 치러본 것이었는데, B4용지 여러 장에 걸쳐 적혀 있는 필자의 답안 요지는 이러하였다.
"의회주의는 '국가정책의 결정 권한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에 유보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도 민주적 정당성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의회주의를 구성하는 기본원리 중의 하나가 바로 '多數決(다수결)의 원칙'인데, 이 원칙은 구성원들의 개별의사를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多數(다수)가 찬성한 의사'를 '전체 구성원을 구속하는 집단의사'로 간주하는 의사결정방식이기 때문에,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 결정된 의사가 단지 '다수만의 의사'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전체의 일반의사'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과 갈등을 이성적인 토론을 거쳐 조절할 필요가 있다. 다수결의 원칙은 '결과의 원칙'이 아니라 '과정과 절차'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위 사례의 경우, 형식적으로 多數(다수)를 채웠다고 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준수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다수결 원칙의 실질을 완전히 도외시해 버린 법안의 가결 선포는 '의회주의'라는 헌법의 기본원리를 위반한 것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답안 작성 당시의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위 답안은 어디까지나, 책과 강의를 통해 헌법을 배우고 익힌 평범한 한 법대생의 답안이다. 세상을 먼저 살아오신 어른들은 흔히들 말씀하신다. 세상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책에 적혀 있는 그대로 그렇게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른들의 말씀처럼, 세상이 그렇게 융통성 없는 곳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 되지 않는가. 최근 소위 미디어법안 통과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언제부터인가 '배운 대로, 책에 적혀 있는 그대로'의 예외로 전락해 버린 국회의 현실이 너무도 유감스러울 뿐이다.
하경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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