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도시는 종소리를 같이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해 시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농촌지역과 달리 도시의 시간은 나름대로 통제됐다. 그런 만큼 종은 도시의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서울이든 대구든 종루는 공간적으로 중심에 있지 않았다. 서울의 경우 정도(定都) 직후에는 원각사 입구에 종을 걸었다고 하니 중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태종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웅장하지만 시끄러운 종소리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까이서 듣고 싶지 않은 왕의 심리가 작용한 듯하다. 물리적 중심과 감성적 중심의 충돌인 셈이다.'(전우용 '서울은 깊다')
이런 불합리함을 덮으려는 듯 종루를 중심으로 한 거리는 도시의 중심이 됐다. 육의전의 중심 상점이 종각 주위에 분포된 것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해서 동서로 뻗은 길을 조선 초기부터 운종가(雲從街)라고 부른 것도 상업적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구름처럼 몰리는 현상을 나타낸 것이다.
대구 종루가 읍성의 중심지가 아니라 남문인 영남제일관에 설치된 이유에 대해서는 문헌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서울의 해석에 견준다면 '경상감사의 새벽과 밤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는' 뜻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사람이 많이 다녀 정문 역할을 하는 영남제일관에 종루를 만든 건 서울의 종로처럼 상업적 기능을 배려한 게 아닐까. 전문가들의 연구를 기다려본다.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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