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2세 때 몹시 숭배했던 소녀가 있다. 안네 프랑크.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가족과 함께 숨어살다가 결국 발각돼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았던 비극의 유태인 소녀. '안네의 일기'를 읽었던 어린 시절, 나에게 그런 역사의 진실이나 시대적 아픔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느 사춘기 소녀의 가슴 떨리는 첫사랑과 문학적인 감수성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은둔생활을 하는 안네의 다락방은 마치 비밀스럽게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의 별, 그리고 그 별들을 삶의 미스터리처럼 숨긴 깜깜한 밤하늘, 그런 모든 깊고 거대한 우주의 낭만으로부터 격리된 '사춘기의 밀실' 같았다. 언제 나치에게 잡혀갈지 모른다는 유태인 소녀의 공포와 두려움이 나에게는 세계를 향한 문이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사춘기의 공포와 같았나 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설레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두려운 것이어서 어른이 돼야만 하는 그 세계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말았으면, 그래서 이대로 영원히 사춘기 소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에서 읽은 한 문장이 그토록 내 가슴을 흔들었나 보다. "나는 결코 평범한 어른은 되지 않겠다." 이렇게 당당하고 멋진 말을 할 수 있는 안네가 나치에게 힘없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어느 날 어른의 세계로 열려 버릴 문 앞에서도 자신만만하고 아름답게 서 있을 것이다. 열두살의 나는 밤마다 안네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이 바로 '나의 일기'이다.
2006년 12월, 나는 암스테르담 프린스엥그라흐트가 267번지 안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2층짜리 적갈색 벽돌집 위에 푸른 지붕의 다락방이 얹혀 있었다. 안네를 만난 지도 20년이 지나 나는 어느새 32세가 돼 있었다. 20년 동안 나는 평범한 어른이 되지 않는 것보다 평범한 어른이 되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삶은 아직까지 그 비밀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세계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래서 늘 불안과 공포는 예기치 않게 들이닥치고 나는 제발 좀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다.
박물관으로 변신한 안네의 집은 앞채와 뒤채로 나뉘어져 있는데 뒤채의 2층에 안네의 가족과 그녀의 첫사랑 피터의 가족이 함께 숨어살았던 은신처가 있다. 은신처로 통하는 비밀통로는 회전식 책장으로 은밀하게 가려져 있다. 나는 20년 전 매일 밤 턱을 괴고 안네에게 편지를 쓰던 대구 복현동 63㎡(19평)짜리 주공아파트의 현관문을 열듯이 비밀통로로 들어섰다. 은신처의 계단들은 너무 가팔라 찾아온 관광객들 모두 꾸부정하게 벽을 더듬으며 올라간다. 20년 전 읽었던 안네의 일기에 설명되어 있는 풍경 꼭 그대로다.
안네가 기대었던 그 벽을, 안네가 피터의 방으로 오르내리던 그 좁은 통로를, 안네를 불안하게 했던 싱크대의 물소리가 울리던 그 부엌을, 안네가 피터와 첫키스를 나눴던 그 다락방을! 12세의 내가 책에서 가슴 떨리게 읽었던 안네의 모든 이야기를 어른이 된 나는 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먼 나라 소녀의 이야기는 이제 역사이고 현실이었다. 12세의 내게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강해보였던 우상 같은 존재, 안네는 결국 내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어른세계의 폭력에 죽임을 당했다.
어린 시절 내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멀게만 보였던 안네의 나라 네덜란드는 이제 12시간 비행기만 타면 닿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게 63㎡ 주공아파트의 현관문만 나서면 세계는 온통 거대한 미스터리로 꿈틀되는 미지의 공간이었듯이, 여전히 이 세계는 알 수 없는 고통과 혼돈의 공간이다. 나는 세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행을 하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그 세계로 되돌아온다.
암스테르담의 기차역은 늘 여행자들로 북적거린다. 자유와 반란을 꿈꾸는 전세계의 히피들과, 일본과 중국, 한국에서 온 얌전한 대학생들과, 고흐와 램브란트를 찾아온 예술가들이 기차역 주변 어지러운 골목길들을 들뜬 표정으로 누빈다. 하지만 좁은 운하와 작은 다리들로 이어진 이 작은 도시는 언제나 평화롭고 조용하며 유럽의 여느 도시들처럼 너무나 평범하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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