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한여름 밤의 옛이야기

한여름 밤, 마을의 공원은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군것질을 즐기거나 얘기꽃을 피우며 노는 사람들 모습이 정겹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다. 아이들이 적어서 그렇다. 어른들끼리 조촐한 술판이나 화투판을 벌이는 모습은 흔하되 아이가 낀 자리는 드물다. 더러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 모습도 보이지만,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는 아이끼리 놀 뿐이다.

그 모습을 보자니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여름 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놀던 장면이다. 모깃불 피워 놓고 어른 아이 섞여 앉아 밤하늘의 별도 세고 수수께끼 놀이도 하며 더위를 쫓았지. 그러다가 판이 무르익으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에게 구수한 옛이야기 한 자리씩 들려주기도 했는데…. 그 시절 아이들은 비록 가난하여 먹고 입는 것은 쪼들렸으나 이렇듯 이야기 문화만은 풍성하게 누리며 자랐다.

그러던 것이 세상이 달라지면서 이야기 문화도 사라졌다. 이제는 어느 집에서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옛이야기 들려주는 모습은 보기 힘들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대신 "이걸 해라, 저걸 해라."는 짤막한 지시 명령을 듣고 자란다. 쉴 새 없이 공부에 쫓기며, 가끔 잠깐 짬이 나도 텔레비전을 보거나 비디오 게임에 빠질 뿐이다. 이래서 요즈음 아이들은 정서에 허기가 진다. 비록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해도 마음은 늘 허전한 것이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는 식구들끼리 마음을 나누는 기회를 빼앗는다. 이를테면,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텔레비전 보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치자. "엄마, 오늘 학교에서 말예요…." 그러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한다. "너 그렇게 어정거릴 시간 없다. 빨리 씻고 학원 가야지." 어머니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이를 다그친다. 뒤늦게 학원에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은 아이에게 어머니가 "너 아까 무슨 얘기하려고 했니?" 하고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다. "아무것도 아녜요. 나 지금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이렇게 해서 식구들 사이에 대화는 끊기고 마음의 벽은 높아진다.

이야기 문화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준다. 내 마음 한 구석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야기판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상대의 미묘한 표정과 눈빛의 변화까지 느끼며 이해와 배려를 배우는 것이 또한 이야기판이다. 옛이야기는 이야기의 꽃이라 할 만하다. 거기에는 끝없는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고 삶의 지혜가 숨어 있으며 또한 준엄한 진실이 들어 있다. 사랑하는 가족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듣는 옛이야기 한 자리는 그 어떤 잠언보다 값질 것이며 그 어떤 격려보다 힘이 될 것이다.

옛이야기에는 대개 가난하고 천대받는 주인공이 나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행복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바리데기'는 일곱째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는 처지가 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인내심과 모험심으로 아버지를 살려내고 완성된 인격으로 우뚝 선다. 또한 '반쪽이'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온갖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지만 남다른 힘과 슬기로움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행복을 얻는다. 이 발랄한 틀은 듣는 이에게 '대신 겪기'의 즐거움을 주며,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자던 꿈에 날개를 달아 준다.

옛이야기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가르친다. 욕심 부리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살며 작은 것도 귀히 여기라고. 우직해 뵈기만 하는 이 가르침이 오늘날 더욱 빛나는 까닭은, 우리 사는 세상이 이미 지나치게 물질과 욕망을 향해 치닫기 때문이리라. 경쟁과 이익 추구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세태가 날이 갈수록 우리 마음을 메마르게 한다면, 그것을 치유하는 길은 우리가 본디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옛것의 가치'를 되살리는 길뿐이다. 그 가치 한가운데 옛이야기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감히 권한다. 이 여름 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옛날 옛적에 가난한 나무꾼이 살았는데…"로 시작해서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란다"로 끝나는 구수한 옛이야기 한 자리 풀어놓는 건 어떨까. 이야기판이 무르익을 때쯤이면, 장담하건대 한아름 행복감과 함께 식구들 사이가 성큼 가까워진 것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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