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32) 의성의 정신, 조문국①

신라 사벌국과 자웅 다툰 강력한 고대 소왕국

2천년간 잠들어있던 의성의 정신 조문국은
2천년간 잠들어있던 의성의 정신 조문국은 '21대 369년의 왕의 역사'가 존재한 강성 국가였다. 의성 땅에 산재한 고분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고, 규모도 경주의 왕릉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고대 의성 땅에 조문국이라는 찬란한 역사·문화가 꽃핀 것이다.
금성면 금성산의 서쪽 한자락에는 봉유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벽이 있다. 봉유대는 바로 조문국의 존재를 알리는 유산이다.
금성면 금성산의 서쪽 한자락에는 봉유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벽이 있다. 봉유대는 바로 조문국의 존재를 알리는 유산이다.

경북에서 고분이 많은 곳을 묻는다면 먼저 떠오르는 곳은?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와 대가야의 수도 고령 정도가 아닐까.

이젠 의성도 '고분의 고장'으로 그 이름을 당당히 올려야 할 것 같다. 일행은 의성의 고분 수와 그 장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고분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금성면 탑리를 중심으로 대리리와 학미리 일대에 200여기, 단촌면 후평리·병방리·관덕리·장림리 등지에 400여기, 점곡면 윤암리와 송내리에 90여기, 다인면 평림리·양서리·달제리·송호리·봉정리 일대에 150여기 등이 대표적인 의성 고분군들이다.

이곳뿐이랴. 옥산면 입암리와 구성리, 사곡면 공정리, 안계면 안정리, 구천면 위성리, 신평면 월소리, 단밀면 생송리와 낙정리 등지에도 크고 작은 고분들이 소복했다. 의성은 선사시대의 무덤인 지석묘도 수백개에 달했다.

뭘 말할까? 바로 고대부터 사람이 살고, 마을이 생기고, 국가로까지 발전했다는 증거다. 이들 고분은 경북의 3대 곡창지대인 안계들(평야)을 감싸고 있다. 안계들의 서쪽인 낙동강과 의성의 젖줄인 위천, 그리고 안계들의 '절묘한 만남'은 바로 인간에게 곡식을 바탕으로 한 삶의 터전을 제공한 것이다. 곡식은 사람을 모이게 했고, 사람들에게 풍요를 제공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 풍요를 지키기 위해 세력을 만들었고, 그 세력은 국가라는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했을 것이다.

일행은 이들 고분 중 금성면의 고분군에 주목했다. 의성읍을 나와 남쪽으로 향하다 금성면 소재지에 못미처 만나는 언덕에 다다랐다. 언덕 오른편에 펼쳐진 장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십기의 대형 고분들이 언덕 아래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지 않은가. 경주의 왕릉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잘생긴 고분들이었다. 수많은 고분들 중 화강석 비석에 적힌 경덕왕릉은 능의 둘레가 74m, 높이는 8m에 달했다. 왕릉 바로 옆에 발굴 작업이 한창인 능의 규모 역시 경덕왕릉급이었다.

대형 고분들은 바로 의성의 뿌리이자 정신인 조문국의 찬란한 유산이다. 조문국은 삼한시대 금성면을 중심으로 지금의 의성 땅을 지배한 고대 소왕국(학술용어로 읍성국가)이다. 조문국이 있었던 시대에 경북에는 김천의 감문국, 경산의 압독국, 경주의 사로국, 상주의 사벌국, 청도의 이서국, 울릉의 우산국 등의 고대국가가 존재했다. 고대 소왕국들의 역사가 그러했듯 조문국도 언제 생겼고,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조문국은 분명 찬란했다.

삼국사기는 "벌휴니사금(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의 왕) 2년(185년)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갈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하였다"고 적었고,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도 "조문국의 옛터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조문리라 부른다"고 기록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은 그의 문집에서 "천년의 조문국 옛터가 처량하다. 번화했던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고, 거친 풀 들꽃만이 향기롭다"고 했다.

조문국의 화려한 부활에는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이 쓴 미광이라는 55쪽 분량의 서책이 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유물을 한창 강탈하던 시기의 이 일본인 역시 상당량의 조문국 유물을 가져갔을 것이다. 한편으론 조문국의 유물을 직접 보았을 것이고, 이에 근거해 조문국의 역사를 책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또 1960년 국립박물관의 탑리고분 발굴조사, 1965년 경희대의 대리리고분 발굴조사, 1995년과 1996년 경북대의 대리리와 학미리고분 발굴조사에서 공작새 날개 모양의 금동관, 나비모양의 관장식, 금동신발, 귀고리 등 수많은 장신구가 쏟아졌다. 특히 의성 지역만의 독특한 형태의 토기도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들 유물과 유적은 조문국의 찬란한 문화와 그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성이 금성면 초전리에 조문국 박물관을 짓는 것도 조문국의 화려한 영광을 세상 밖에 마음껏 알리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행은 의성의 향토사학자들로부터 '21대 369년의 왕의 역사' 자료를 받고 놀라움이 더했다. 예왕에서 묘초에 이르기까지 21명의 왕 이름과 재위연도, 재위기간의 주요 업적 등이 담겨 있었다. 그 실체 여부를 떠나 왕의 역사라는 그 단초를 찾고, 증빙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의성은 지난 6월 학술포럼을 열었고 왕의 역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면 조문국의 힘은 어느 정도였을까? 의성 사람들은 고대의 소왕국 중 조문국만이 신라의 전신인 사벌국과 자웅을 겨룰 만큼 강성했다고 여기고 있다.

우선 고분 수와 그 규모를 놓고 보면 범상치가 않다. 드넓은 안계들 주위가 좀 과장하면 고분 띠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경북의 여느 소왕국을 봐도 의성만큼 고분이 많고 규모가 웅대한 곳은 여지껏 확인하지 못했다. 조문국은 경북의 3대 곡창이라는 광활한 안계들을 가졌다. 곡창은 고대에선 국가의 기반이다. 안계들의 규모에서 조문국이 당시 여러 소왕국에서도 '대국'이었을 가능성을 쉽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 삼한의 소왕국 규모는 대국의 경우 3천~4천가구에 인구가 1만명 이상, 소국은 600~700가구에 인구가 3천~4천명 정도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조문국은 가구 수가 3천가구에 인구는 1만명가량으로 파악되고 있다.

강성국가 조문국의 실체는 삼국사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의성 땅은 경북 북부 내륙 또는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데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곳이었다. 다시 말해 신라가 낙동강 상류지역과 소백산맥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반드시 확보해야 할 땅이 조문국이었고, 북방의 남하세력을 견제하기에 가장 중요한 곳도 바로 조문국이다. 조문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던 것이다. 또 벌휴왕이 조문국과의 싸움에 파견한 좌우군주의 위상에서 조문국의 힘을 알 수 있다. 좌우 중 선임인 좌군주 구도의 벼슬은 파진찬이었다. 파진찬은 신라의 17등 중 네번째 관등으로 진골 이상의 계층이 임명됐다.

특히 구도는 신라 최장의 왕조인 김씨 왕조를 연 미추왕의 아버지다. 실제 의성의 고분에서 나온 적석목곽분은 김씨를 상징하는 묘제로 당시 의성 땅이 신라의 김씨 시대를 연 힘의 근원이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쌀이라는 곡창과 함께 고대국가 힘의 근원인 금이 의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구도는 의성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상주, 안동 등 금 생산지를 자신의 정치·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김씨 시대의 토대를 다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문국이 김씨 신라를 연 발원지로 유추해 봄직한 대목이다.

신라는 지금의 금성면에 소경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소경은 왕이 사는 왕경(경주)에 비견하는 작은 서울의 의미로, 조문국의 독자 세력이 강했기에 이에 대한 각별한 예우 차원에서 소경을 설치한 것일 게다.

의성 사람들이 조문국을 의성의 뿌리요, 정신으로 자부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종규기자 의성·이희대기자 사진·윤정현

자문단 김종우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 안종화 의성군 재산경영담당 김문진 의성군 문화예술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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