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맛 향토음식의 산업화] ⑥울진 물곰탕

추위 쫓던 한겨울 음식, 이제는 더위 쫓는 명품음식

갓 끓여낸 물곰탕이 톳나물과 쇠미역무침, 가자미밥 식해와 함께 소담스럽게 차려졌다.
갓 끓여낸 물곰탕이 톳나물과 쇠미역무침, 가자미밥 식해와 함께 소담스럽게 차려졌다.
울진 곰치 유통의 대부, 윤선동씨가 살아있는 곰치를 들고
울진 곰치 유통의 대부, 윤선동씨가 살아있는 곰치를 들고 '숙취를 푸는 데는 물곰탕이 그만'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곰 많이 넣어 놨는교…" "예에. 많이 넣어 놨니더"

울진 후포항 내 한 물곰탕 식당 문이 열리면서 뱃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주방 쪽 식당 주인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단골손님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주인도 마찬가지다. 도마질을 하면서도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대답만 한다. 울진 후포항 뱃사람들이 밤샘작업을 하고 아침 해장국으로 먹던 곰치국이 '물곰탕'이라는 이름으로 날로 인기를 더해 간다. '후루룩' 그냥 마셔도 될 만큼 육질이 부드러워 속을 확 풀어주는 물곰탕. 원래 추위를 쫓고 숙취를 풀기 위한 한겨울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피서철에도 인기 있는 사시사철 음식이 됐다.

'많고 많은 생선 중에 무슨 물곰탕이냐'고 할지 몰라도 이는 못 먹어 본 사람들이나 하는 말. 수건을 목에 걸고 땀을 훔쳐가며 먹는 물곰탕 맛은 살얼음 낀 동치미와 냉면 국물을 엄동설한 겨울철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들이켤 때의 그 맛과 같다. '뜨거워도 시원하다'는 맛이 진정 어떤 맛인지를 알게 해 준다.

◆천하일미 물곰탕과 곰치회

후포항에서 활어 곰치 유통의 대명사격인 대명수산식당. 원래 이집은 활어 유통만 했으나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물곰탕을 대접하다가 결국 전문 식당까지 하게 됐다.

"어서 오이소." 인심좋기로 소문난 후포 토박이 윤선동(57)씨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들어선 식당 양쪽 수족관엔 요즘도 곰치가 가득하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서 머리가 곰처럼 생겨 물곰 또는 곰치라고 이름이 붙여졌단다. 이 지역 사람들은 그냥 끓이기 전엔 곰치라고 부르다가도 끓여 놓고선 물곰탕이라고 한다.

곰치는 버릴 게 아무것도 없다. 껍질 머리 애(내장) 등뼈 알 등 모두 탕재료로 쓴다. 횟감을 떠내고도 한광주리다. 너무 크면 뜨거운 고깃덩이가 목구멍으로 그냥 미끄러지듯 넘어가 목젖을 덴다며 좀 작게 한입거리로 썬다. 윤씨는 익숙한 솜씨로 뚝딱 한마리를 잡아 횟거리와 탕거리로 나눠 금방 주방으로 넘긴다. "그냥 집에서 먹던 대로 하는데 무슨 별난 기술이 있나요." 이집 안주인 방연옥(55)씨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겸손해 한다. 그렇지만 방씨의 손맛은 수준급. 겨울철 물곰탕을 여름철 이열치열의 대표적인 바닷가 음식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후포항에서 소문이 나 있다.

먼저 된장을 조금 푼 물에다 무와 콩나물을 넣고 끓이다가 장만해 둔 곰치를 넣고 더 끓여낸 다음 왕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고기를 늦게 넣는 것은 담백함과 감칠맛 그대로를 손님상에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파, 마늘, 청양고추와 새송이, 팽이버섯을 넣고 다시 끓여 구수한 냄새가 퍼져 나올 즈음 손님상에 낸다. 총 조리시간은 5분. 마치 순두부찌개처럼 온통 냄비가 흰색으로, 보기에도 맛깔스럽게 변했다. 국자로 떠내 한숟갈을 입에 넣은 사람마다 한마디씩 한다. 처음 '괜찮다'에서 '야 맛있다'이다. 한그릇을 비워내고선 '그래 이맛이야' '아! 이래서 시원하다고 하는구나'로 점점 강도가 높아진다. 바닷내음을 듬뿍 머금은 곰피무침, 가자미밥 식해와 쇠미역 무침, 톳나물에도 그저 젓가락질이다.

"회맛도 괜찮아요. 한번 맛보실래요?" 탕 후식으로 곰치회가 올려졌다. 뭉텅뭉텅 썰어놓은 모양새와 달리 별미였다. 되직한 초장을 간장으로 묽게 한 간장초장에 찍어 먹는 이 회는 한점만 입에 넣어도 마치 살얼음 얹은 솜사탕 같아 입안이 시원해진다. 하얀 속살이 '사르르 녹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목마를 때 냉수 대신 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윤씨의 말이 느낌으로 다가올 만큼 이번엔 '차갑게' 시원하다.

◆곰치는 울진산이 최고

추석 전후 오징어잡이 철이 시작되면 채낚기 뱃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후포항은 연일 성시를 이룬다. 회를 뜨고 탕을 끓이고. 물곰탕집도 그야말로 대목이 시작된다. 후포항 대게배는 모두 16척. 1주일마다 포구에 들어오는 배 한척에 보통 곰치 100마리씩 잡아온다. 통발배마다 3℃를 유지할 수 있는 수조를 장착하고 '귀하신 몸'이 된 곰치를 산 채로 위판장까지 모셔 오다시피 한다. 강원도 주문진과 삼척, 영덕 포항 등 동해안에서부터 서울 인천 등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동해안 일원에서 골고루 잡히지만 특히 울진 근해에서 잡히는 놈이 크고 맛이 있어 제값을 톡톡히 받는다.

지금은 게통발 어선이 조업을 하지 않아 활어 곰치를 구경하기가 힘든다. 이달 말쯤 홍게잡이가 시작되면 곰치 활어 위판도 다시 시작된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아 얼음을 채워 보내면 48시간 동안은 거뜬히 살아있어 활어 택배 유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경매가로 2만5천원에서 4만원까지 하는 곰치는 택배비를 제외하고도 4만원에서 최고 7만원까지 거래된다. 소매가가 두배로 뛰는 이유는 곰치 수조 수온을 3도로 차갑게 유지해야 하는 등 관리가 까다롭기 때문. 수백m 깊은 바닷속처럼 차게 해줘야 한달가량 살 수 있단다.

"얼린 곰치는 탕을 끓이기에는 맞지 않아요. 고기살이 갈라지고 감칠맛이 떨어져 활어와는 맛이 비교가 안 됩니다."

윤씨는 곰치가 귀할 때는 사촌뻘인 삼천포산 물메기로 끓이기도 하는데, 비린내가 나고 맛이 훨씬 덜하다고 한다. 4만원짜리 활어 한마리로 회 뜨고 탕까지 하면 10인분 정도 낼 수 있어 1인분에 7천원으로 셈할 경우 한마리로 7만원을 만든다. 냉동곰치는 마리당 1만원선.

◆동해안 특산 곰치 이야기

곰치는 동해안에서만 난다. 그래서 강원도 주문진과 동해, 경북 울진과 영덕, 포항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곳곳에서 물곰탕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울진 후포항을 으뜸으로 손꼽는다. 게통발 어선이 많아 활어로 위판되는 곰치가 가장 많은 곳이 후포항이어서 그렇게 알려진 듯하다. 수심 400∼500m 차가운 바닥에 사는 곰치는 대게와 새우, 작은 생선 등을 먹고 사는 육식성이다. 이전에는 곰치가 천덕꾸러기였다. 항구 시장통에 나가면 발에 밟히는 게 곰치. 생선명부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주문진 등지에서는 김장철 소금에 절여뒀다가 배추와 함께 버무려 김치 양을 불리는 데 쓰기도 하고, 말려 뒀다가 반찬이 없을 때 채반에 쪄서 심심풀이로 먹었다. 내륙지역으로 치면 그냥 무시래기급. 그런 곰치가 일약 스타급으로 등극한 것은 전적으로 1980년 5공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 덕분이다. 당시 지방시찰차 울진에 들렀다가 해장국으로 물곰탕을 맛본 전 전 대통령이 이튿날 충남 당진 제철소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밤새 과음한 후 속쓰림을 풀기 위해 '어제 먹은 그것 다시 가져오라'고 수행원에게 지시했다. 비서진들이 헬기를 띄워 부랴부랴 울진에서 물곰탕을 공수했다는 에피소드이다. 마치 '도로 묵호로 보내라'는 도로묵 이야기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아직도 지역 공무원들 사이에 '5공(五共) 물곰탕' '전통(全統) 곰치탕'으로 회자되곤 한다. '곰치가 어디서 나는지 아직도 모르냐'며 개그풍의 이 이야기가 울진 물곰탕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재미나는 음식 스토리텔링 소재로 정착돼 가고 있어 눈길을 모은다.

전통음식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프리랜서 강병두 pi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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