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늦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보니 전화 받은 남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해진다. "잘 자래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또 전화가 울리고, 그래도 웃으며 전화를 받는 남편을 보며, 그들만의 애정 행각이 시작됐음을 알았다.
한잔 했다는 핑계로 머리도 희끗해진 남자들끼리 야심한 밤에 전화 장난을 하고, 한잔 했을 때 생각나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믿는 남편의 긴 전화 너머로 5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해 온 그의 동무들이 보였다.
벌거벗고 함께 미역 감으며 새까맣게 여름을 나던 시절. 너나없이 다 어렵던 시골 살림에, 찾아온 친구 대접한다고 선반에 올려놓은 보리밥 내려 먹여주었던 친구, 악동들 심한 발냄새를 못 참아서 쫓아낸 친구의 누나 이야기, 막걸리 처음 마시고 응급실에 실려 간 기억,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를 반복해 듣다 보면 중독성이 생겨 마침내 나까지 그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듯한 착각이 든다.
그 동무들이 이제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두 달에 한 번 전국의 산을 찾아 등산도 하고, 길이 멀면 친구 집에서 일박도 한다. 비가 오는 산길을 같이 걷고, 얼어붙은 폭포도 같이 보고, 심지어 여름 휴가까지 시간을 맞추어 미국에서도 나온다.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웠고, 다음엔 심하다 싶었는데, 그러다가 남편 친구가 나의 친구가 되고, 친구 부인이 내 친구가 되고, 더 시간이 지나니 멀리 사는 가족 같고, 흉허물이 없어졌다. 친구들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레는지 전날 밤에 미리 배낭을 현관 앞에 모셔두고 자고 왔다는 부인의 흉에도 싱글거리기만 하면서, 정으로 고물 무친 떡과 과일과 마실 것들을 끝도 없이 내놓는다. 걷자고 모인 것인지 먹으려고 모인 것인지 아예 구별이 되지 않는 산행 중 휴식시간도 은근슬쩍 전통이 됐다.
'하나라도 이 세상 먼저 떠나기 전에'라며 사진관에 가서 포즈 잡고 찍은 사진 속의 남자 12명이 믿음직하고 정겹다. 모이기만 하면 나이를 잊는 그들. 하지만 삶이 너무 허무해지고, 나이 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날이 올 것이다. 오라는 이, 반갑다는 이도 줄고, 자식도 함께해 주지 못할 노년의 그 쓸쓸함이 찾아왔을 때, 사진이 비좁도록 어깨 붙인 저 친구들은 같이 늙어가며 옆에 있어줄 것이다. 지금처럼 산모퉁이를 같이 돌아가 줄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고비마다 웃겨주고 놀려주고 의지도 되어주며, 무엇보다 아껴줄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갈 그들이 보여서, 그래서 그 동행이 아름답다.
금동지 대구가톨릭대 외국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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