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진학 예정인 고교생들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예년보다 시원해졌다지만 여름 무더위가 여전한 가운데 공부하기에 한창이다. 오직 점수에 매달리는 학생들이라면 불안한 날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정하고 이를 향해 한 발짝씩 내딛는 입장이라면 남들보다 느긋한 시간을 보낼 만도 하다.
문학과 과학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아 그에 맞는 꿈을 찾아 달리는 태가연(18·경북여자정보고 3년)양과 김동건(18·대구과학고)군을 6일 각자의 학교에서 만났다.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서 쾌거
김동건군은 지난달 12일부터 19일까지 멕시코 메리다에서 열린 제40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세계 80여개국 600여명의 영재들과 겨루어 이론 부문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실험을 포함한 성적에서는 세계 3위로 아깝게 개인 종합우승을 놓쳤다.
당시 상황을 물었다. 동건군은 "실험이 끝난 후 '수식 2개를 잘못 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 때문에 2, 3점이 깎일 것 같았죠. 1위하고 1.45점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아까웠는지 몰라요"라고 답했다. 동건군은 그 원인으로는 준비기간이 짧았던 점을 들었다. "참가 한달 전에 모여서 실험을 10번 정도밖에 못했어요. 2년 전부터 선수를 선발해 철저하게 준비해 온 중국과는 너무나 달랐어요."
그러나 이는 좌절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론 면에서는 세계 최고수임을 인정받았기 때문. 동건군은 이 때문에 분야(이론·실험·종합·여학생·개최국학생)별로 1명씩 수여하는 특별상(금메달)을 수상했다. "전 세계 선수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집중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갈 때는 기분이 정말로 짜릿했어요."
동건군의 꿈은 뇌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아직 연구할 거리가 무진장 많은 응용과학 분야이기 때문. 언제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뇌과학 전문가인 조장희 박사의 강연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단다. 원래 의공학 쪽으로 전공을 하고 싶었는데 조금 방향을 튼 셈이다. 동건군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일단은 의과대학으로 진학을 생각하고 있다.
◆딱딱한 이미지 벗는 과학자로
동건군이 생각하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실험에 매몰된 냉정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웃음과 따뜻한 감성이 가득한, 사람 냄새가 나는 과학자를 꿈꾼다. 평소에도 '남들은 다 유치하다고 하지만' 장난치기를 즐긴다. 특별상을 수상할 때에도 무대로 올라가는 동안 일부러 넘어지는 혼자만의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동건군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리처드 파인만을 존경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파인만은 "과학은 즐거운 장난"이라고 말한 바 있다. "파인만은 스웨덴까지 가기 귀찮아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적도 있잖아요. 미스터리한 인물인데 이런 인간적인 면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싶다는 욕심은 과학자의 성취욕을 엿보게 한다. '자기장의 법칙'을 발견한 테슬라처럼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업적을 이루는 것이 동건군의 꿈이다. "노벨상을 받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받으면 좋죠"라며 씩 웃었다.
지난해 11월 일찌감치 서울대 수시 2학기 전기컴퓨터공학부에 우선 합격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대회 준비에 매달린 것도 일종의 성취욕 때문이었다. 중3 때부터 출전한 한국물리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못 딴 것이 계기였다. "어떻게든 물리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었거든요. 저 자신은 물론 부모님에게도 떳떳해지고 싶어서요."
◆시인을 꿈꾸는 문학소녀
태가연양은 지난 5월 열린 제5회 대한민국 청소년박람회 행사 가운데 '청소년 창작 대전' 시 부문에 응모해 대상인 보건복지가족부장관상을 받았다. 9~18세 대한민국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전체 우승을 한 셈이니 개인에게는 커다란 영광일 터. 가연양의 재능에 관심을 보였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시 한번 칭찬이 쏟아졌다.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던 가연양이 시 쓰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준 것도 바로 칭찬이었다.
대상작 '모기향'은 시골 할머니댁에서 타들어가는 모기향을 뱀이 허물을 벗는 것에 연상해 전개한 작품이다. 자연스런 시상 전개가 빼어난 작품. 가연양은 이 주제를 인터넷에서 모기향 사진을 본 뒤 떠올렸다고 했다. 평소 방식대로다. 가연양은 이런 식으로 떠오른 모티프를 필기보다는 휴대전화의 메모장에다 쳐서 저장한다고 설명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는 아이디어는 필기하기까지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란다.
평소 가연양은 좋아하는 작품을 필사하고 잘된 표현은 반드시 메모를 한다. 좋은 작품은 외우기도 병행한다. 어휘력과 표현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가연양은 "이렇게 하다 보니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필요없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했다. 가연양은 소설가 신경숙씨를 존경한다고 했다. 작품 중에는 신씨의 '외딴 방'을 좋아한단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 공장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였단다. 굳이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려는 이유도 신씨(서울예대 문창과 출신)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향한 진지한 고민 가득
가연양에게 '고민이 무엇인지' 물었다. 가연양은 "좋은 글을 못 쓸 수도 있다는 것이 고민"이라고 답했다. 시를 쓸수록 남의 눈치를 보게 될까 두렵다는 얘기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좋아하더라도 '싫은 건 싫다'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자신만의 소신 있는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미래상으로 꼽았다. 이러한 대답에서 가연양이 이미 문학인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지하게 답을 하다가도 이내 웃음을 짓고 수줍은 표정의 소녀로 되돌아갔지만 이미 마음속은 넓은 문학의 세계를 닮아 있었던 것.
대구시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문학영재반에서도 이 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다. 가연양은 "제 또래와 함께 문학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수 유일한 곳이라서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우리나라 고교 과정, 특히 실업계 학교에서 문학이 등한시되는 현실에서 유일한 탈출구로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실업계 고교로 진학을 결정하고 나서의 일도 가연양의 문학적 감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글 안 쓰고 취업하겠다는 생각에 경북여자정보고에 원서를 냈는데 바로 후회가 되더라고요. '계속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일까? 중학교 때부터 가연양을 지켜봐 주고, 문학적 재능을 발굴하고 이를 키워준 배계순 교사와의 관계는 어느 누구보다 끈끈하다. 인터뷰 말미에 배 교사와의 인연에 대해 묻자 가연양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먹이는 통에 "너무 고마운 선생님"이라는 말도 겨우 들렸다. 가연양이 7세 때 무려 1천만원어치의 책을 사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도 든든한 후원자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