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9월 20일, 천년 제국 바티칸이 종말의 위기를 맞습니다. '젊은 이탈리아 군대'가 자원병과 용병으로 구성된 교황군을 공격하자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교황은 백기를 걸고 항복합니다. 통일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이탈리아의 200여번의 폭격에 8세기 이래 존재했던 교회 국가 바티칸이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언어를 계승하고 전 세계를 향해 소명을 수행했던 가장 부유한 유럽의 봉건 국가 바티칸이 지도에서 지워져버린 것입니다. 이로써 한때 포(Po)강 유역에서부터 나폴리 성문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보유했던 교회 국가의 수장 교황 비오 9세는 적국으로 둘러싸인 바티칸에 갇혀 죄수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근 백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과연 종교 국가 바티칸의 힘은 소멸되고 만 것인가!'
세인들의 궁금증조차 사라질 무렵인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뉴욕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섰습니다. 총회 연설에서 그는 바티칸제국의 부활을 선언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중세의 교회보다 더 거대하고 강하게 진화된 바티칸, 10억이 넘는 신자를 가진 세계적인 조직과 이들을 이끌고 있는 4천500명의 주교와 40만명의 주교구신부와 수도회 신부, 그리고 75만명의 수녀로 구성된 초강제국, 바티칸은 가톨릭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거의 모든 국제회합에 참여하는 가장 활발한 보통 국가로 부활한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유엔 총회에 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티칸의 존재가치를 입증한 하나의 사건 때문입니다. 바로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였습니다. 당시 서방 지역 유일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쿠바와 미국의 갈등이 첨예화되자, 소련의 흐르시초프는 동맹국 원수 피델 카스트로에게 핵 미사일을 사용하게 해줍니다. 이는 워싱턴의 문 앞에 소련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꼴이어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에게는 용인할 수 없는 위협이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케네디는 쿠바로 가는 핵 미사일 선적 소련 선박을 막기 위해 쿠바 주변에 해상봉쇄령을 내리고 흐르시초프에게 미사일 수송을 철회하라는 최후의 통첩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련 선박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항해를 계속합니다. 냉전 시기의 미국과 소련, 체면도 중요하지만 각 진영의 수장 국가로서 동맹국들에 대한 의무 역시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입장, 양국은 '최후통첩과 무시'의 카드를 꺼내들고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일촉즉발, 두 초강대국 간 핵 전쟁이 현실화되는 듯 보였습니다.
이때, 해결책이 없을 것 같던 긴박한 상황에서 돌연 흐르시초프가 미사일 수송을 철회하고 쿠바의 발사시설을 폐쇄합니다. 케네디 역시 미국이 절대 쿠바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장래에도 쿠바에 대한 어떠한 군사행동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합니다. 예측불허의 국면전환, 그 이면에는 바티칸의 비밀스러운 중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황이 모스크바와 워싱턴 양측에 평화의 교서를 내림으로써 초강대국들이 명예롭게 퇴각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마련해준 것입니다. 아직도 이 중재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만 이를 계기로 바티칸은 양측을 '도덕적 승리자'로 만들었고, 교황의 '인본주의적 개입'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된 것입니다.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2년 10월에 열린 바티칸공의회에 처음으로 철의 장막 저편에 있던 가톨릭주교들이 참여하게 되고, 냉전 해체의 물꼬가 트입니다.
영토나 상주인구 면에서 도시 수준에 불과한 바티칸, 그러나 명실상부 세계 최강 제국 바티칸의 이야기는 루트비히 링 아이펠의 『세계의 절대권력 바티칸 제국』(열대림, 2005)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바티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의 대리인으로 존재하는 성직자처럼 세계를 관장하는 중재자로 역할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바티칸의 정치와 외교 기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 권력을 버리고 전지전능한 절대 권력에 이르게 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문우답(愚問愚答)인 자문자답(自問自答), "정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티칸을 보십시오."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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