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씨앗 하나 땅에 떨어져 있다. 평범한 행인은 그 녀석이 누구인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싹이 돋기 전에는,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우기 전에는 그 씨앗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행인은 원래 가기로 돼 있던 길을 향해 무심한 걸음을 옮긴다.
'혹한의 때에 잠잠할 줄 아는/ 혀끝 비수를 함부로 뽑지 않는/ 뿌리내린 자리에서 옮겨 앉지 않는/ 남의 자리 탐하지 않는/ 뒷모습을 소중히 간직할 줄 아는/ 땡볕까지 다스릴 줄 아는/ 언 땅 뒤집어 만찬을 베푸는/ 돌무더기에서도 자신을 피워내는/ 폭풍 끌고 와 무릎 꿇게 하는 (중략)/ 작고 작은 너' -씨앗- 중에서.
시인 장혜승은 행인의 눈으로 씨앗을 보는 대신 시인의 눈으로 씨앗을 본다. 그에게 작은 씨앗은 이미 생명이요, 우주다. 그에게 씨앗은 땅속에 묻혀 소멸해 가는 물질이 아니라 무한한 세상과 미래를 품고 때를 기다리는 생명이다. 그래서 씨앗은 말 많은 너보다, 이리저리 이익을 탐하는 너보다, 원망으로 가득 찬 너보다, 세상을 다 안다는 듯 지껄이는 너보다, 야박한 너보다, 분탕질 치고 자리 뜨면 그만인 너보다 낫다. 시인에게 씨앗은 불모의 현실을 건너는 힘이다.
'천지가 숫처녀 유두다/ 해를 품고 놀던 계집아이들/ 치마를 걷고 앉아/ 벗은 나무 밑동에 따뜻한 오줌 눈다/ 긴 잠에서 일어나 꾼들 눈곱을 떼어내고/ 방랑의 신을 신는다/ 꽃샘바람 유두를 핥는다/ 오톨도톨 열리는 젖꼭지들/ 고목도 허깨비도 다 깨어난다/ 풍물소리 번져나간다/ 찾아오고 찾아가고 눈 맞추고 입 맞추고/ 잔치잔치 열린다/ 천지가 수태했다/ 겁탈자들 등골 휘겠다.' -삼월에-
장혜승의 시는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결코 요란하지 않음에도 그 시를 읽다보면 아이들 웃음소리 시끄러운 마을의 넓은 마당 앞에 선 듯하다. 아이들은 햇볕을 받으며 종일 논다. 어른들 눈에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데 아이들은 즐겁기만 하다. 장혜승의 시편들은 그렇게 와 닿는다.
'(상략)소나기는 지저분한 땅 수시로 패대고/ 천둥 깨지는 소리에 일어난 하늘/ 쨍쨍한 새아침 털어 널 때/ 누가 찢어발기는 소리로 나팔 분다/ 너, 메꽃/ 탱자가시 맨몸으로 기어이 감아 오르던/ 눈여겨 지켜보던 햇덩이/ 양철지붕 용마루에 턱, 좌정하신다/ 쉿! 접근금지/ 응애- 응애-/ 울타리에 좍, 황금알금줄이/ 저 시끌 가난한 양철 지붕에 청기와 곧 올라가겠다.' -탱자나무와 메꽃-
시인에게는 소나기도 천둥소리도, 쨍쨍한 아침도 모두 생명을 깨우는 소리다. 메꽃은 해를 믿고 날카로운 탱자 가시를 감고 올라 생명을 낳는다. 머지않아 생명은 가난한 양철지붕에 청기와를 올릴 것이다. 아기는 시끄러운 양철 지붕이 아니라 청기와 아래에서 달고 깊은 잠을 청할 것이다. 아이는 잠자는 동안 쑥쑥 자라는 법이다.
생명에 대한 절대적 신뢰, 절대적 외경…. 장혜승의 '씨앗'은 난폭한 햇볕과 겁탈자 같은 바람을 제 품으로 받아들여, 환한 생명으로 피어난다.
경주대 손진은 교수는 "장혜승 시인은 모든 생명이 응축된 가장 작고 여린 자연에서 생명성의 원형을 예단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가능태와 잠재태를 감각한다. 사물에 대한 순간적인 포착과 명징한 인식, 살아 퍼덕이는 언어와 감각, 세상과 나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모성적인 사유로 한 세계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씨앗'에 묶인 시들은 고요하지만 역동이 느껴지는 시들이다. 111쪽, 7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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