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채널돋보기] 안중근, 마지막 3년의 기록

SBS스페셜 16일 오후 11시 10분

1909년 하얼빈역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린다. 동아시아를 쥐고 흔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는 조선의 청년 안중근. 단지로 의거를 맹세한 서른한살 안중근의 거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16일 오후 11시 10분에 방송되는 'SBS스페셜-의거 100년, 대한국인 안중근' 편에서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안중근의 최후 3년을 다루고 있다.

1907년 5월,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통감으로서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한다.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지만 그것이 빌미가 돼 강제 하야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미 7조약을 추진하고,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 군대는 강제 해산된다. 북한 진남포에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계몽교육 운동을 펼치던 양반가 출신의 안중근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뒤 조국을 떠난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안중근은 1908년 7월 홍범도 부대에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으나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밀림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게 된다. 그 와중에 일본군 네 명을 생포하지만, 만국 공법(국제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며 풀어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합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일본의 압박에 독립운동에 어려움을 느낀 안중근은 1909년 2월 열두명의 동지와 '단지 동맹'을 결행한다.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은 거사 후 '나의 행위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이다. 한·일 양국 국민이 서로 일치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며 당당히 동양 평화를 염원한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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