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낙동·백두를 가다] <33> 의성의 정신② '미광'을 통해 본 조문

고분속에 감춰짖 '뜨거운 역사' 밖으로 나오다

금성면 대리리 고분군 중 1호 고분이다. 고분의 주인공으로 전해지는 경덕왕은 조문국의 여러 왕 중 조문국을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든 왕이다.
금성면 대리리 고분군 중 1호 고분이다. 고분의 주인공으로 전해지는 경덕왕은 조문국의 여러 왕 중 조문국을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든 왕이다.
미광은 의성향토사에서 전무후무한 조문국의 역사를 담은 귀중한 책이다.
미광은 의성향토사에서 전무후무한 조문국의 역사를 담은 귀중한 책이다.

조문국의 역사는 그 존재를 알리는 극히 일부의 고문헌과 옛 선현들의 이야기, 그동안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물 정도다. 찬란한 조문국의 역사를 알리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그럼에도 수백기의 고분들이 수 천년의 인고를 견뎌내 지금 의성 땅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뭘 말하는 걸까? 바로 조문국의 역사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고, 단지 그 얼굴을 쉬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분명 '뜨거운 역사'가 고분 속에 감춰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일행에겐 당장이라도 모든 고분들을 발굴 조사해 조문국의 진면목을 단박에 알고 싶은 충동감이 가슴을 엄습했다.

우리는 사료 '미광'에 주목했다. 미광은 일제강점기 산운면(금성면의 전신) 산운초등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중심이 돼 지역민과 함께 만든 책이다. 미광은 의성향토사에서 전무후무한 조문국 시대의 사료를 정리했다. 미광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문화 수탈이 자행되는 시기에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책이라는 점에서 당시 조문국의 유물 상당량이 수탈됐을 것이고, 분명 수탈 과정에서 조문국의 역사적 실체에 놀라 이를 안타까워한 일본인과 의성의 뜻있는 몇몇 분들에 의해 사료로 남겨진 것이다.

단지 입증이 되지 않았을 뿐 '미광 속 조문국'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이야기도 역사가 아닌가. 이야기 역사인 설화와 전설을 넘어 당시 눈으로 확인한 것을 사료로 남긴 것은 조문국을 더욱 우리 곁에 다가오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문국에는 '힘과 문화'가 있었다.

지난 수차례의 고분 발굴 조사에서 나온 유물 중 단연 으뜸은 왕관(금동관)이다. 특이한 것은 경주에서 발굴된 출(出)자형 금관이나 산(山)자 구도가 아닌, 조우(鳥羽)관이라는 점이다. 바로 새의 깃털 모양을 냈다. 조우형은 고구려 고분에서 멀리 중국 둔황석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궁전벽화 등에서 주로 발견됐고, 대개는 벽화에 그려진 것들이다. 벽화가 아닌 금동관 혹은 금관 형태로 출토돼 당시 역사학계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조문국이 신라의 복속 여부를 떠나 왕의 역사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독자 세력을 형성했고, 이들 독자 세력이 조우형 금동관의 주인공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분군에서 연이어 발견된 금동신발, 금제 귀고리, 금동제 과대, 관장식 등도 조문국과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면모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다른 역사 아이콘은 바로 '칼'이다. 칼은 힘과 지배, 권위의 상징이다. 고분 발굴에선 삼엽환두대도와 은장삼엽모자환대도가 나왔다. 금과 은, 구리 등을 사용해 용, 꽃, 물결의 장식과 상감기법 등이 표현됐다는 점이다. 물론 발굴이 되지 않았을 뿐 전쟁에 사용한 칼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이들 화려하고 품격있는 칼은 바로 귀족 등 지배계층의 정치적 지위나 신분을 드러내 주는 증거물인 것이다. 조문국은 물론 당시 조문국 땅의 독자세력들의 칼 문화가 강대했고, 또한 화려했다는 것이 쉽게 짐작이 된다.

봉양면 길천 1리 속칭 '길붓마을' 좌측 농업기술센터 건너편에는 나지막한 산(215.7m)이 하나 있는데 바로 태봉산이다. 지명 그대로 태봉(태실)은 왕이나 왕비, 대군, 왕자 등을 출산하면 그 태를 묻는 곳이다. 태봉산이 바로 그렇다. 미광은 "조문왕자의 태봉은 현재 봉양면 길천동 뒷산 산 위에 있다. 미륵불상을 세웠더니 신도사(인물인 듯 하다)가 불상을 파괴하고 산소를 들여 그 때문에 얼마 아니 가서 온 집안이 명멸했다"고 기록했다. 이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 역시 조문국 경덕왕 태자의 태를 보물과 함께 매장하고, 미륵불을 좌대위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김종우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은 "10년 전 현지 답사에서 미륵불상의 상반신과 도굴된 흔적의 큰 구덩이가 있었다"고 밝혔다.

조문국의 왕은 정벌에도 나섰다. 미광은 조문국이 현재 군위 지역인 적라를 정벌했다고 한다. 간추린 내용은 이러했다. "나라가 강대하고 평온하자 경덕왕은 이웃 나라를 정벌할 큰 계획을 세우고, 어느 날 신하들과 화합을 가졌다. 화합 끝에 김장군을 선봉으로 삼아 일족 중 29명의 호걸을 데리고 적라국 토벌에 나서라고 명했다. 김 장군 등 맹장들은 전승치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왕에게 맹세하고, 돌안(지금의 도리원)을 지나 적라에 들어가 적라를 대파하고, 그 땅을 조문국의 영지로 확장했다. 조문국은 더욱더 강성하게 되었다."

만약 고분의 출토 유물에서 이를 뒷받침할만한 마구류나 말탄 무사 모양의 토기 등이 발견됐다면 경덕왕 정벌기는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미광을 만든 이들이 당시 분명 마구류나 조문국 왕의 정벌 흔적을 보았기 때문에 이를 책에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미광이 말하는 조문국의 '음악'은 일행의 가슴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미광은 "조문국 시대 민요로서 그 으뜸으로 인구에 회자된 것은 비봉곡이었다. 이 비봉곡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한다. 그 곡조를 타기 위해 일종의 독특한 악기를 발명하니 12현의 조문금"이라 적었다.

미광은 조문국 음악으로 영신곡과 송신곡, 비봉곡을 적었는데, 그 내용은 "영신곡에서 조문금의 줄이 끊어졌다. 나는 봉황도 멀리 떠나 갔도다. 또한 송신곡에는 음악소리가 가는 구름과 같이 빨리가는 빛이로다. 옛 조문국을 생각하니 슬프며 잊을 수가 없도다. 날으는 봉황은 훨훨 날아가 그 해는 저물어가니 하늘은 붉었도다. 아름다운 대밭 곁에 손님 없으니 오동나무 꽃도 시들었네. 허전한 구봉산만 남아 있고, 천년 전 생각하니 다시 비봉곡 소리 듣기 어려우리"이다.

미광의 기록들과 함께 조문국 경덕왕릉 향사 때 역시 영신곡과 송신곡이 전하고 있는데, 그 영신곡 첫머리 역시 "조문금 풍류 줄이 끊어지고"라고 시작된다. 조문국 음악을 여러 차례 알리는 옛 기록들이다.

조문국 음악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 결과부터 말하면 조문국의 조문금은 가야금보다 앞선다(?)이다. 사실이라면 한국 음악사에 새 지평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가야금은 가야국 가실왕이 십이현금을 만들어 우륵을 시켜 작곡케 했다. 우륵의 12곡 대다수는 낙동강 주변의 지명을 본 땄다. 우륵이 곡의 이름으로 지명을 본 땄다는 의미는 당시 낙동강 주변 소국에 음악적 기반이 있었다는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 우륵의 12곡 중 한 곡인 달기는 현재의 의성 다인면 지역으로 알려져 왔다. 이에 따라 의성의 향토사학자들은 가야금은 조문국의 조문금이라는 음악적 기반이 어떤 형태로든 작용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미광은 조문국의 마지막도 상세히 적고 있다. 바로 신라와의 전쟁이다."신라 구대 벌휴왕이 즉위했다. 조문국이 근래 비상한 세력을 얻게 되자 신라는 사신을 파견해 항복하라고 강요하니 조문국 왕은 군신을 회합하고 대책을 모의했다. 이에 교전하기로 결정하고 신라사자 두 사람을 참살하니 신라 왕은 더욱 크게 성을 내 그 다음해 2천여명의 장병으로 조문국을 공격케 했다. 조문국 왕은 금성산 주위에 석성을 구축하고 방어에 돌입했다. 조문국 왕은 성을 굳게 지켜 응전하니 신라의 강함으로도 쉽게 격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내 양식은 점점 결핍되고, 적의 형세 역시 대단했다. 이에 조문국 왕은 묘한 계책을 세웠으니 이는 성내의 작은 산에 볏짚을 쌓아 곡물을 저장한 듯이 적에게 보이게 하고, 또 백토를 물에 타서 넘쳐흐르게 해 쌀뜨물 같이 보여 며칠을 버텼다. 하지만 아무리 용사가 많다 할지라도 굶주리고는 (전쟁을) 할 수가 없었다. 칠일 동안 불꽃 격전을 벌였으나 끝내는 패배를 면치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왕은 전사하고, 조문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당시로선 대군인 2천여명의 장병과의 치열한 격전을 볼 때 조문국의 강성 정도를 알 수 있다.

미광은 흥미진진했다. 비록 그 내용을 입증할 만한 유물과 유적이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하지만 단지 몇 개의 고분 발굴에서만 금동관과 의성만의 특징이 강한 토기 등 괄목할 만큼의 유물이 나왔다. 따라서 조문국 역사와 조문국 이후 강성한 독자 정치세력의 명쾌한 해답은 수 백기의 고분 속에 담겨 있다.

이제 의성은 조문국이라는 '진행형 작품'을 완성작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다. 조문국의 역사를 복원하고, 어둠 속에 수 천년 잠자고 있는 고분을 하루 빨리 발굴 조사해 조문국의 찬란한 역사·문화가 화려하게 부활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종우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투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과 고려, 조선 중심이다. 고대 소왕국도 엄연히 우리의 역사임에도 소홀하게 다뤄졌다"며 "이제 소왕국의 역사를 대대적으로 규명해 우리 역사의 큰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규기자 의성·이희대기자 사진·윤정현

자문단 김종우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 안종화 의성군 재산경영담당 김문진 의성군 문화예술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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