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문화음식학교 내 '라선제'는 고도 신라 천년의 역사와 숨결을 간직한 경주의 보문단지(신평동 375-3) 안에 있다. 라선제는 신라왕가의 전통음식인 '신라 이사금 밥상'을 맛볼 수 있는 한식전문식당으론 전국에서 유일하다.
이사금 밥상 요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여러 문헌을 통해 밝혀진 신라시대 아홉가지 진귀한 '구진미'(九珍味)가 기본 식재료다. 구진미는 보리, 고사리, 들깨, 잔대(도라지), 사슴, 돼지, 황태, 생강(마늘), 살구다. 맛을 내는 양념은 꿀, 된장, 소금, 액젓, 해(밥식해 종류)를 쓰며 식재료 모두 자연산. 조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약이 되는 음식이란 뜻의 '약선(藥膳)요리' 대가인 라선제 대표 차은정(42) 교수는 철저한 기록 고증과 연구과정을 거쳐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을 내는 이사금 밥상을 개발해 신라 왕가음식의 맥을 이어냈다. 의학자들의 자문을 거쳐 대표적 약선 요리로 선정된 이사금 밥상 요리는 전통 신라음식을 재현해 냈다는 의미도 크지만 현대인들에게 대표적인 건강식으로서 각광받는다는 사실도 적잖은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5월 개관한 라선제는 신라왕실을 상징하는 황금색을 메인 컬러로 연꽃잎 문양을 새겨 넣은 기둥 등으로 신라 전통왕실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4계절로 배경을 달리하는 잘 다듬어진 정원은 신라의 궁궐을 연상시킨다. 보문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면서 라선제에서 이사금 밥상을 마주한 것은 한국 전통의 미(味)와 미(美)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내외국인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만큼 아주 특별한 전통한식 체험장으로 권하는 데 손색이 없다.
◆'약선'인 이사금 밥상 코스
주방에선 신라전통복장을 한 요리사들이 각자 맡은 10여가지의 요리에 매달려 분주하게 움직인다. 전통요리 20년 경력의 최분이(68)씨는 황태에 간장과 들기름을 발라 구운 뒤 양념한 사슴고기를 다지고 찹쌀을 얹어 다시 굽는 작업에 정성을 쏟는다. 들기름은 들깨를 일일이 까서 만든다.
"'어록구이'라는 별미인데 제맛을 내려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합니다. 요리는 진짜 끼가 없으면 못 만들지요" 최씨는 낯선 외부인의 갑작스런 주방 '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어록구이를 만든다. 굽기 전 길쭉하던 황태가 절반으로 오그라지도록 구워낸다. 이어 어성초와 감초로 달인 물에 쇠고기를 볶다가 살구청을 뿌려 '약고추장'을 만들어 낸다. 볶은 고추장이다. 요리 별로 체크해 나가던 차 교수가 절이고 숙성시킨 배추에 보리를 개어 소금과 액젓으로 간을 맞춘 '보리물 김치'를 맛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일반 된장과 같은 '빡빡장'은 돼지고기와 무, 양파, 고추, 파 등을 썰어 빡빡할 때까지 끓여 보기에도 군침이 돌 정도로 독특한 장맛을 낸다.
연회장 식탁에 오른 요리는 주방에서 접하던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한 유물을 모델로 제작한 놋그릇에 담긴 요리들은 품격이 더해진다. 라선제에서 사용되는 합, 대접, 접시, 잔, 수저 모두가 신라유물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이사금 밥상 코스 중 제일 먼저 선을 뵌 음식은 잣, 밤, 쌀, 개암열매 등을 넣고 끓인 '선죽'으로 부담없이 먹기에 편하고 공복을 채워 준다. 이어 흰콩으로 만든 두부에 경주 이사금 농산물인 토마토 소스를 첨가시킨 '두부선'과 고사리와 들깨를 쪄서 만든 '임자증' 등이 식전요리로 나온다. 차 교수는 식전요리는 심장과 간장 기능을 도와주는 음식이라며 라선제에서 직접 담근 동동주인 '라선주'를 곁들여 보라고 권한다.
이어 신장과 폐의 기능을 도와주는 음식인 메인요리로는 방아잎과 당귀잎을 찹쌀풀에 적셔 튀긴 '산야초 부각'과 '어록구이' '보리물 김치' '신라 비빔밥'이 나왔다. 산야초 튀김은 간장소스가 필요 없을 정도로 상큼한 맛을 낸다. 경주에서 자생하는 잔대, 미나리, 버섯, 고사리, 생채, 호박이 들어간 비빔밥에 빡빡장과 약고추장을 섞어 비벼 한숟가락을 뜨니 신기하게도 맵거나 짜지 않고 담백하다. 아, 신라 이사금들이 이렇게 담백한 맛을 즐겼나 보다. 소화를 촉진시키는 후식요리로는 살구 요구르트와 수정과가 입가심으로 나온다. 차 교수는 "신라왕가의 약선 재료를 각종 문헌에서 발췌해 전통조리법 연구와 개발 작업을 거쳐 선정한 메뉴"라고 설명했다. 가격에 따라 육두품, 성골, 진골에 이어 최고 밥상인 이사금 등 모두 4종류의 메뉴가 있다.
◆전통음식 산업화와 세계화 모색
차 교수는 라선제와 연계해 이사금 밥상 요리 등 신라 전통음식과 약선요리 메뉴 개발, 기술 전수를 위해 경북도와 경주시의 예산 지원을 받아 지난해 9월부터 (사)한국역사문화음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전통음식 산업화의 첫 단계로 전문가 양성에 나섰고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Food Doctor(푸드닥터·약선 치료사) 자격증을 부여해 창업과 취업을 돕는다. 음식학교는 신라의 생활약선음식 기초과정을 비롯해 대학 수준의 전문교과 과정인 한국 약선대학이 있다. 전국에서 찾아온 조리 코디네이터, 외식 실무자, 해외 조리사, 건강음식점 창업 희망자, 병원 영양사나 관련 직종 조리사 등이 주로 수강을 한다. 현재 방학을 맞아 전국 중·고교의 교사 40여명이 음식학교에서 신라 전통음식과 약선요리의 역사와 문화, 요리기술을 연수 중이다.
한식 세계화에 발맞춰 한국 국제교류재단 추천으로 외국 방문객들도 줄을 잇고 있다. 지난달 3일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초청으로 방한한 차세대 호주지도자 대표단 20여명은 라선제에서 신라 전통음식을 체험하며 약선요리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또 외교통상부 초청으로 방한한 유럽 39개국의 고교 교사 40여명이 라선제를 찾았고, 일본의 대학교수와 외식업·식품가공업계 관계자들도 찾아와 신라음식을 체험했다. 벌써 일본의 여행업체들은 경주 관광코스에 라선제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달 말 중국 항천에서 열리는 음식한국대전에도 초청을 받았다.
차 교수는 "일본 쓰시가 세계인들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쓰시요리 전문조리사 10만 양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전문가 양성으로 신라 전통음식의 산업화를 이루고, 꾸준한 국제교류로 우리 음식문화의 세계화에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전통음식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강병두 pimn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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