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아무리 불가능은 없다고 해도 못 오를 나무는 또 있다.
뭔가 이루려고 죽기로 노력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퇴장하는 장면은 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스카페이스'나 '칼리토'는 뒷골목에 길게 드리워진 슬픈 심상을 잘 전해주었다.
한 남자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석양이 붉게 물든 해변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무릎을 베고 안식하려던 꿈은 사라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잊혀지는 것이 서정적 비극미의 정점이었다.
한국에서는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가 이런 느낌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삼류 조직의 2인자 병두(조인성). 보스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틈에서 제대로 기회조차 한 번 잡지 못한 채 떼인 돈이나 받아주며 별 볼일 없이 살아가고 있다.
병든 어머니와 두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29살의 삼류 인생.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온다. 조직의 뒤를 봐주는 황 회장(천호진)이 은밀한 제안을 해 온 것이다. 미래를 보장할 테니 자신을 괴롭히는 검사를 한 명 처리해 달라는 부탁이다. 병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제 모처럼 만에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다. 친구 민호(남궁민)와의 우정, 첫사랑 현주(이보영)와의 관계도 잘 풀려 나간다.
그러나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진다. 민호가 영화 속에서 자신의 범행을 노출시키고, 이제 그는 죽음과 목도한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늘 그렇듯 그 끝에도 배신이란 놈이 똬리를 틀고 있다.
'칼리토'에서 조 카커의 '유 아 소 뷰티플(You are so beautiful)'이란 곡과 오페라 아리아가 주 음악으로 쓰였다면 '비열한 거리'에서는 나훈아의 '땡벌'이란 곡이 병두의 삶과 운명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 당신은 못 믿을 사람. 아~ 당신은 철없는 사람. 아무리 달래봐도 어쩔 수는 없지만, 마음 하나는 괜찮은 사람…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추워요~'
땡벌은 무지막지한 살인벌이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악어와도 같이 끈질기다. 자신을 땡벌에 비유하며 서서히 지치고 힘들어가는 모습을 잘 투영하고 있다. 못 말리는 땡벌을 원망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해요 땡벌 땡벌. 당신을 좋아해요 땡벌 땡벌. 밉지만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라고 끝을 맺는다. 한 없는 자기 연민이 잘 그려져 있다.
한국 영화에서 우리 가요가 적절하게 잘 쓰인 경우는 많다. '어린 신부'에서 문근영은 노래방에서 '난 사랑을 아직 몰라'라고 열창하고,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은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른다. 사랑도 모르면서 결혼부터 덜컥한 어린 신부,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이제 힘들게 만난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삶이 이 노래들로 인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김혜수는 '바람아 멈추어 다오'를 부르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가 창 밖을 서글프게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흐른다. 노래가 장면을 살리고, 주인공의 감정을 대신했다. '비열한 거리'에서의 '땡벌'은 저속한 삼류 건달의 감정을 직접적이면서 폭발적으로 전달한다.
'땡벌'과 대척점에 있는 곡이 황 회장이 부르는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라는 곡이다. 병두가 저속하고 서투르다면 황 회장은 노회하고, 음흉하다. 뒤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면서도,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이중 인격자다. 병두가 아끼던 부하의 손에 죽고 난 후 그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한, 내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도 당신을 따라오죠. 내가 늙고 조금 더 현명해져 세상을 깨닫게 되면, 아팠던 말들도 더 이상 큰 의미가 없고, 가을바람처럼 내 곁을 스쳐 지나갈 거예요. 시간까지도 희미해진 언젠가 사람들이 당신을 알았느냐고 내게 물어오면 나는 웃으면서 말하겠죠. 내 친구의 중의 하나였다고. 그리고 슬픔이 내 눈가에서 사라질 거예요.'
나이가 든다고 현명해질까. 세월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이고, 어느 날 그림자가 찾아올 때 그 지나온 시간들이 바로 나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현명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을 성찰하는 노래와 달리 영화는 늙고 교활한 한 노인네의 수완을 은근히 뒤틀어 비꼬고 있다. 서툰 기술과 격한 열정으로 살아온 29살 남자의 감정은 거칠고 직접적인 톤의 '땡벌'로, 노련한 기술로 삶을 연명해 온 노인의 노회함은 부드러운 톤의 팝송으로 '맞짱' 뜨게 한다.
'올드 앤 와이즈'는 병두의 죽음에 대한 애도곡이 아니라, '철없이 날뛰는 젊은 것'에 보내는 경계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파라다이스의 꿈을 접고, 석양이 붉게 물든 해변이 그려진 사진을 보며 눈을 감는 칼리토처럼 병두의 못 이룬 꿈이 그래서 더욱 처연하게 다가온다.
김중기 객원기자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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