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霧津(무진), 굳이 우리말로 풀이하면 '안개 나루터' 정도가 될 듯하다.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본 지명이다. 1960년대 한국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바다에 인접한 도시의 지명이다. 이 소설은 '안개'라는 영화로도 제작돼 당시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서울 생활에서 상처받은 인물이 남쪽 고향인 무진에 와서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여러 면모를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즘 다시 '무진'이란 지명이 화제이다. 발간 1주일 만에 15만 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는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의 주 무대가 바로 무진이다. 역시 남쪽 바닷가이면서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이 도시도 안개로 덮여 있다. 습하고 축축한 안개 알갱이는 도시 전체를 '흐리멍덩'하게 만들고 있다.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는 모든 게 가려져 있고 어둡고 음습하게 진행된다. 문학에서 안개의 이미지는 밝음, 투명, 소통, 정의, 희망 등의 반대 이미지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어둠, 억압, 소통 불능, 부정의, 희망 없음 정도가 될 것 같다.
한 지방 도시에서 벌어진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소설은 국민들의 세금인 정부 예산을 매년 40억 원씩 받는 '자애'학원이라는 장애인 학교에서 교장과 교장의 쌍둥이 동생인 행정실장, 기숙사 사감 교사가 번갈아가며 장애 학생들을 성폭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불행한 사건이 전혀 공권력의 힘이나 지역사회 상식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이 장애인 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취직하는 데서부터 우리 사회의 상식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사장의 질녀와 연고 때문에 잘 봐줘서 큰 것 한 장 대신에 작은 거 다섯 장의 기부금을 받는 데서부터 비상식은 시작한다.
지역 인권단체에서 교장의 파렴치한 장애 학생 폭행 사실을 고발하지만 무진경찰서 형사, 시교육청 장학사, 시청 담당 공무원, 판'검사, 하물며 영광제일교회 교인들, 무사모(무진을 사랑하는 사람들)라는 시민단체까지 철저히 담합해서 이 사건을 은폐시키는 데 일조한다. 지역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총동원돼 지역 유지이면서 비리 주범인 이강석 교장을 살려낸다. 마치 성벽처럼 견고하고 거대한 이 惡(악)의 담합과 공모 앞에서 인간의 '양심'은 보잘것없는 사치에 불과하단 말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온다.
문제는 '무진'에서 벌어지는 이 협잡과 타락의 추악한 풍경이 단지 소설 속의 가상공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점점 더 강자 중심으로 변해가는 경제, 기득권자들의 담합과 약자들에 대한 억압, 정의의 실종, 민주주의의 후퇴와 같은 사회적 퇴행 현상이 무진에서 벌어지는 '악의 카르텔'과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나의 이 우려가 한 소심한 지식인의 기우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가령 최근 군 기무사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쌍용차 사태에서의 노동자 구속, 4대 강 개발 사업에 대한 과도한 예산 편성,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복지 예산 축소, 재벌'보수 언론을 배려한 미디어법 개정, 지방 도시에서 대학생들의 여당에 대한 화염병 투척 등은 한동안 우리사회에서 잊혀졌던 퇴행적인 가치들이 마치 무진의 '안개'처럼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군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한 야당 의원의 주장대로 사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지 오웰은 1948년에 미래사회인 '1984'라는 소설로 전체주의와 감시받는 사회에 대해 경고한 바 있지만, 감시받는 사회는 인간의 인격과 존엄이 파괴되는 야만의 사회인 것이다. 오웰의 '1984'에 대해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 소설이 당시 독재자로 이름 높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라는 식으로 일면적으로 이해한다면 불행한 일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오늘날 우리 사회가 군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해 그러려니 하는 식으로 안이하게 넘어간다면 곧 더 큰 재앙으로 우리 사회를 덮칠 게 분명하다.
64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고, 농성에 참여했던 비해고 노동자 94명에 대해 휴업 조치를 취한 쌍용차 사태, 복지 예산 축소로 7천 명의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지원 중단 등도 정부가 저지른 폭력이 아닌가? 우리 사회를 역사적 퇴행으로 몰아가고 있는 '야만의 안개'를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경북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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