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집성촌] 영천 임고면 선원리 영일 정씨

수려한 풍광에 녹아든 '충효' 정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로 유명한 포은 정몽주 선생 종증조부의 후대가 살고 있는 영천 임고면 선원리의 영일 정씨(迎日 鄭氏) 집성촌을 찾았다.

선원리는 마을의 뒷산 언덕이 고리 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하여 환고, 또는 대환으로 불리는데 영천지역 내 살기 좋은 3곳(자천'환고'평호) 중 하나로 꼽힌다.

재정비 작업이 한창인 포은 정몽주 사당을 지나 선원리로 들어서니 고색창연한 개와(蓋瓦)지붕과 정자의 헌함(軒檻)들이 즐비해 반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수려한 산세 풍광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며 곳곳에 양반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현재 60여 가구의 후손이 복숭아'사과 농사를 지으며 옛 선조들의 얼을 잇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정희문(70'임고서원 숭모사업회)씨는"영일 정씨의 영천 입향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4대조로 전해지고 있다. 영일 정씨는 본관을 영일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1981년 영일 정씨 포은공파 종중에서 영일 정씨 세보를 편찬하면서 영일로 통일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을 탈환한 호수공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장손으로 왜군에 포위된 아버지를 구하고 순국한 백암 정의번의 아들 정호예가 선원리에 입향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해남 현감으로 청백리로 추앙받았던 입향조 정호예의 손자인 함계 정석달(鄭碩達'1660~1720) 선생이 함계정사를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안빈낙도의 삶을 산 터전이기도 하다. 함계 선생의 이기설(理氣說) 즉, 주리(主理)적인 논설(論說)은 너무도 유명하다. 함계 선생은 대유학자인 매산 정중기(1685~1757) 선생을 낳으신 분이며, 또'평생용력 유일간경(平生用力 惟一簡敬)'이라 하여 평생을 경(敬)으로 수양에 힘썼다.

함계 선생의 장자인 매산 정중기는 당시 괴질을 피해 선원리에서 8㎞쯤 떨어진 삼매로 자리를 옮겨 집을 짓고 마을을 이뤘다. 현재 선원리에 남아 맥을 잇고 있는 자손들은 함계 선생의 3남 정중보의 후손들이다. 입향조인 해남공 정호예가 이 마을을 선택한 것도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할 만큼 마을의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빼어났기 때문으로 마을 이름 또한 선원이라 불렸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며 학산(200m)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 중앙에 두리등(頭里嶝)이라는 언덕이 있어 예부터 부자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마을 뒤에는 선조의 묘소가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1만여㎡의 울창한 송림이 있다. 자손들의 정성으로 가꾸어진 숲으로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인근 초'중'고교생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영일 정씨를 이야기할 때 포은 정몽주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영천을 충효의 고장으로 떠올리게 한 포은 선생은 본관이 연일(延日)로 영천의 동쪽 우항에서 태어났다고 여러 문집들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부친 일성공 정운관과 모친 영천 이씨의 상을 당하여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해 이후 양반들의 효행의 기준이 된 '시묘살이'의 효시가 됐다. 선생의 이러한 효성을 기려 1389년(공양왕 1년)에 출생지인 임고면 우항리에 효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뒷날 비석이 없어진 것을 1487년(성종18년) 경상감사 손순효가 찾아내 다시 세웠으며, 이때 비각도 함께 세워졌다. 이 비각은 1992년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72호로 지정돼 선생의 효정신을 전하고 있다. 포은 선생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돼 향년 5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했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이 마을은 충효의 고장일뿐 아니라 전통 기와집과 정자로도 유서가 깊다. 지방문화재자료 230호로 지정된 함계정사는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며, 인품과 덕망이 높았던 함계 정석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인 죽비공 정일찬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입구 작은 언덕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남쪽 언덕 아래에 작은 계곡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과밭에 편입돼 물은 남아있지 않다.

또 하나의 고택은 정용준 가옥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07호인 이 고택은 현 주인인 정용준씨의 8대조가 조선 영조 원년(1725)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돼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一字)형으로 합쳐있고, 문을 들어서면'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ㅁ'자형 평면을 이룬다. 본채와 50여m 떨어진 냇가의 정자는 건축 직후 옆의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어나 연정(蓮亭)이라고 편액했다는 초익공의 집이다. 연정 앞으로는 학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시냇물이 굽이치고 정자 동쪽에 구부정한 연못이 연꽃을 감싸 안고 있다. 소나무'느티나무'팽나무'물버들'향나무'회화나무'모과나무 등이 연못을 둘러싸고 숲을 이뤄 자연의 맛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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